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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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문으로 불교 억압을 비판하다

백곡 처능(白谷 處能 1617-1680)①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백곡 처능 스님은 조선왕조의 노골적인 불교 탄압과 억압이 지속되었던 조선불교역사에서 왕에게 상소문까지 올려 불교탄압의 부당성을 알린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의 비문에 의하면 속성은 전全씨요, 이름은 신수愼守, 법명은 처능處能, 자호自號는 백곡白谷이다. 어머니 김씨가 홍제사弘濟寺 석불에 기도하여 인도의 스님이 2개의 구슬을 머금는 태몽을 꾸고 1617년 5월 3일에 1남 1녀 가운데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스님은 나이 12세인 1628년(인조 6)에 벽암 각성 스님의 제자 의현義賢 스님에게 출가하였고, 16세인 1632년(인조 10)에는 선조의 사위인 신익성에게 경사經史 및 제자諸子와 시문詩文을 배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대의 이름난 관료와 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택당 이식(澤堂李植, 1584-1647), 백주 이명한(白洲李明漢, 1595-1645), 백헌 이경석(白軒李景奭, 1595-1671), 현주 윤신지(玄洲尹新之, 1582-1657), 동강 신익전(東江申翊全, 1605-1660), 분애 신정(汾厓申晸, 1628-1687), 식암 김석주(息庵金錫胄, 1634-1684), 명곡 최석정(明谷崔錫鼎, 1646-1715) 등 당대의 정계 인물이나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유가 문인과의 교유는 스님의 글과 유가적 식견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견줄 정도로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스승 벽암 각성 스님이 선조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을 비롯한 유불儒佛 인사들과 교유한
전통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스님은 이와 같은 상호 소통 분위기의 흐름에 부합하여 불교 억압을 반대하는 상소도 가능했을 것이다.
스님은 20세(1636년, 인조 14) 무렵 지리산 쌍계사에 머무르고 있던 벽암 각성 스님을 찾아가 수선修禪과 내전內典을 익혀 상수 제자로 20여 년간 함께 하였다고 한다. 스승 벽암 스님은 부휴 선수 선사에게 사사한 후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 지역을 유력하며 수행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해전海戰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부휴 스님에게 강석講席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벽암 스님은 1612년(광해군 4) 2월에 일어난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스승 부휴 스님, 의승수군 승대장義僧水軍僧大將 자운 삼혜慈雲三惠 스님과 더불어 무고를 당하였지만, 그것을 계기로 광해군에게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벽암 스님은 1624년(인조 2)부터 1627년(인조 5)까지 8도 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축성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는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 3천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돌아왔다. 1640년(인조 18) 8월에 규정도총섭으로 적상산성을 수축하고, 사고史庫를 수직하기도 하였다.
백곡 스님은 30세인 1646년 무렵에는 문장으로 스승뿐만 아니라 인조仁祖에게까지 인정을 받았다. 당대의 문인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 1634-1684)도 ‘대사의 문장은 자못 광대무변하였는데, 마치 계곡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 듯하였고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고 하였으며, 자수 무경(子秀無竟, 1664-1737) 스님도 ‘우리나라의 시승詩僧은 고금에 수가 많지만, 문장과 도덕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분은 오직 백곡 스님뿐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스승 벽암 스님이 주로 활동했던 순천 송광사와 완주 송광사, 합천 해인사, 보은 법주사 등의 사찰에서 불사佛事를 함께 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의 선풍禪風을 현창하고자 하였다. 스님은 30세인 1646년(인조 24)에 구례 화엄사에서 강설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화엄사의 여러 전각을 중건하고 백곡 스님이 법회를 개최하여 선풍을 계승 진작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스승 벽암 스님이 주관하는 안심사의 강학회에 참여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금산사에서 대법회를 5일간 주관하기도 하였다.
1657년(효종 8) 무렵에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벽암의 저술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에 대한 발문을 지으면서 불교 의례집의 간행에 동참하여 불교의례의 확립으로 유교의례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석문상의초』는 1636년(인조 14) 벽암 스님이 편찬한 것으로 백곡 스님은 『다비문茶毘文』을 합철하여 징광사에서 간행하였다. 『석문상의초』는 당시 불가에는 스님들의 상의喪儀에 대한 근본이 없고, 시행되는 것이 규범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더욱이 중국 불교는 우리나라의 예禮와 부합되지 않으므로 『선원청규禪苑淸規』, 『오삼집五杉集』, 『석씨요람釋氏要覽』 등에 의거하여 그 핵심 내용을 뽑아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스님이 이와 같이 여러 사찰에서 다양한 불사를 일으킨 것은 전란과 소외로 폐허가 된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당시 교계의 염원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스님은 1661년(현종 2) 정월에 8,150자에 달하는 상소문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지어 불교 배척의 부당성을 6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올렸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예시하면서 불교가 국가의 다스림에 방해되거나 해롭지 않았다고 하면서 불교의 전래 이후 사찰은 국가를 비보裨補하고, 승려는 국가와 민중에 애국 애민의 종교였다고 강변하였다. 특히 중국의 대유大儒들이 오히려 불교 이론을 깊이 통달한 점을 열거하여 폐불의 부당성을 항변하였다. 더 나아가서 유교적 요소로서 불교를 이해하려는 원융적圓融的 태도를 보여, 유교의 성명설性命說·인의설仁義說을 그대로 불법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리고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봉은사와 봉선사는 역대 왕실의 내원당內院堂과 외원당外願堂으로, 폐쇄하거나 그곳의 스님들을 축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스님은 의승장으로도 활약했다. 46세인 1666년(현종 7) 조정에서 남한승통직을 제수받았으나 거절하였으며, 4년 후 50세 때인 1670년(현종 11)에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제수받고 3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이후 1674년(현종 15) 「봉국사신창기奉國寺新創記」를 지은 후 ‘겸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兼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직에 재임하였다. 스님의 문집 『대각등계집』에 의하면 자신이 ‘천리 밖 영남에서 도총섭을 지내느라 십 년 동안 숲에서 다 낡은 승복을 입었다’고 하여 영남도총섭을 제수받아 10년간 재직하였던 듯하다. 1674년(현종 15) 김좌명金佐明의 주청으로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속리산·청룡산靑龍山·성주산聖住山·계룡산 등지에서 산림법회山林法會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스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대둔사大芚寺의 안심암安心庵에서 강법을 개당하자 학도들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10월에는 백암 성총栢庵性聰 스님이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문을 다시 새겨 중건했을 때는 선사로서 참여하는 등 보조국사 지눌의 선풍을 현창하고 불교의례의 보급으로 불교계를 수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말년인 1680년(숙종 6) 봄에 김제 금산사에서 대법회를 5일간 열고, 얼마 후 스님은 세수 64세, 선납禪臘 49세로 금산사에서 입적하였으며, 모악산 금산사, 대둔산 안심사, 계룡산 신정사(현재 신원사)에 각기 부도탑이 세워졌고, 1683년(숙종 9) 어록인 『대각등계집』이 각판되었다.
스님은 조선 역사에서도 가장 암울한 시기를 살다 가셨다. 전란과 전염병, 자연재해 등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스님들이 산성축조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동원되어 극심한 고통이 계속되어 환속자가 속출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스님은 스승과 함께 폐허가 된 사찰을 중건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강원에서 사용되는 교재를 간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세상을 탓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고, 불교가 지닌 탁월한 가치를 상소문으로 대변하기도 하였다. 백곡 처능 스님에게서 조선불교가 지닌 저력과 진정한 수행자와 스승의 귀감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