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조선시대를 살다 간 스님 가운데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허무맹랑하고 간사한 말로 꾀어낸다하여 역모죄로 세상을 등진 두 분의 스님이 계신다. 허응당 보우(虛應堂普雨, 1509~1565) 스님과 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 스님이다. 불교가 탄압을 받았던 엄혹한 시대에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고 거센 바람 한 점 피할 길 없었던 것도 서러운 일이거늘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유배를 가고 맞아 죽거나 병을 얻어 죽은 것이다. 인천의 스승이자 거룩한 승보僧寶의 존망이 낙엽보다 가볍고 개미 목숨보다 더 가벼웠다.
환성 지안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고 춘천 사람이다. 1664년(현종 5)에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에서 머리를 깎고 쌍봉 정원雙峰(霜峰)淨源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7세에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1704) 스님에게 법을 구하니 월담 스님은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고 의발을 그에게 전했다. 스님의 골상은 맑고 엄숙하였으며 음성은 신령스럽고 밝았다. 말은 간략하였고 안색은 늘 온화하였다. 부처님의 경전(內典) 연구에 몰두하느라 아예 침식을 모두 잊기가 예사였다고 한다. 스승 월담은 청허 휴정의 4세 정맥正脈을 잇고, 화엄경과 선문염송에 해박하여 선禪과 교敎를 동시에 휘날린 거장이다.
스님의 법명은 지안志安이다. 일찍이 스님이 춘주春州(춘천) 청평사淸平寺에 머물고 계실 때 일이다. 경내의 누각 아래에 영지影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진흙으로 연못을 메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 연못을 복구하는 도중에 작은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비석에 ‘유충관부천리래儒衷冠婦千里來’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선비의 마음(儒衷)’이란 ‘지志’ 자를 의미하고 ‘부인이 관을 썼다(冠婦)’는 것은 ‘안安’ 자를 뜻하며 ‘천리千里’란 ‘중重’ 자를 의미하니, 이를 풀이하면 ‘지안志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이곳에 다시 온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스님의 법명이 지안으로 된 것이다.
환성 스님이 해남 대흥사에 머물고 있으면서 부처님께 공양을 진설陳設할 때, 공중에서 세 번 부름을 받았고, 그때마다 환성 스님도 역시 세 번 응답한 사실이 있어 마침내 호를 환성喚醒이라 하고, 자字를 삼낙三諾이라고 하였다.
27세 때에는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 대사가 금산金山(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갔는데, 모운 스님이 환성 스님의 학덕學德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탄복하고 수 백 명의 학인들에게 말하였다.
“내 이제 사자좌獅子座를 거두고 떠나니 너희들은 스승의 예로 이 스님을 섬기도록 하라.” 이런 당부를 하고는 자리를 물려준 후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산으로 떠나갔다. 환성 스님은 마침내 대중들 앞에 나아가 종縱으로 설법하고 횡橫으로 설법하였는데, 털을 나누고 실을 가리듯 그 호연浩然함이 마치 강물이 콸콸 흘러가는 듯하였다. 스님의 강연은 뜻이 깊고 묘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았으므로 의심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여러 주석서註釋書를 실은 빈 배가 전라도 낙안의 징광사澄光寺 부근에 왔는데, 그 주석서들의 내용이 환성 스님이 말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마침내 대중들이 스님의 설법을 듣고 활연豁然히 다 깨달았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사방의 스님들이 바람에 쏠리듯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덕망과 재주 있는 후학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조선시대 불교계의 선교학 법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재주뿐만 아니라 후학들을 제접할 수 있는 능력있고 전도유망한 인물이 나타나면 마치 일상사처럼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홀연히 떠나버린다. 이것이 불교가 탄압받고 소외 받았던 시절에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였다.
스님이 언젠가 지리산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도인이 앞에 나타나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속히 이 자리를 떠나십시오.” 과연 며칠이 지나자 화재를 만나 그곳이 다 타버렸다. 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는데 스님이 행장을 꾸려 그곳을 떠났다. 산 아래 부잣집에서 초청하였으나 스님은 그 집에 가지 않고 인근 작은 집에 들어가 투숙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사찰과 부잣집은 모두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1724년 금산사에서 화엄법회를 개설했을 때 법회 대중이 1,100여 명이나 되어 영산회상과 비슷하고 기원정사를 방불케 하였다 그 도를 높이 받들고 그 덕을 우러렀으니 대중의 입이 바로 비碑라 어찌 붓에 있겠는가? 아 그 신령스런 마음과 신묘한 법체를 우러를 수는 있었지만, 엿볼 수는 없었고 그 바다 같은 법과 지혜의 근원을 경험할 수는 있었지만, 헤아릴 수는 없었다. (환성대사행장)
1724년 금산사金山寺에서 큰 법회를 열었는데 대중들이 무려 1,000여 명이나 모인 일이 있었다. 스님의 행장은 당시 화엄법회가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비슷했고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스님과 함께 동시대의 상월 새봉(霜月璽封, 1687~1767) 스님의 법회 역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사부대중이 운집했다. 상월 스님이 1754년 선암사에서 화엄대회를 열었을 때는 모인 사람이 1,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스님과 화엄경은 그 인연이 각별했다. 출가하여 만난 스승들이 모두 화엄의 대종사들이었다. 문중의 어른이었던 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 스님부터 화엄경에 음석音釋을 남긴 화엄종장華嚴宗匠이었으니 직접 사사를 받지는 않았으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또한 첫 만남에서 법석法席을 물려 준 직지사의 모운 진언 스님도 화엄종사였고, 스님이 처음 출가한 용문사에 주석하며 구족계를 준 상봉 정원 스님도 화엄경에 정통하였다. 이와 같이 스님과 인연을 맺은 모든 스승들이 화엄종의 스승들이었다.
조정은 이후부터 불교계의 화엄경을 강론하는 법회를 금지시켰다. 불교계의 집회를 역모逆謀의 가능성으로 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이 66세 때인 1725년(영조 1)에 스님을 시기하던 이가 무고誣告하여 지리산에서 체포되어 호남의 옥사에 갇히게 되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나게 되었으나 그 도道의 고위 관리가 석방 불가를 고집하여 마침내 탐라耽羅(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지 7일 만인 7월 7일에 그곳에서 별안간 적멸을 보였으니 3일 동안 산천이 울고 바닷물이 끓어올랐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예전에 세 성현이 탐라에 온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환성이 그 한 분이라고들 말했다. 세 분 성현에 대해서는, 한라산 꼭대기에 돌부처가 있는데 그 돌부처 등에 새겨진 글이 있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세 분 성현이 입적할 곳으로서 한 분은 중국의 정법正法 보살로서 이곳에 와서 살다가 입적할 것이요, 또 한 분은 동국의 허응虛應 존자로서 이곳에 들어와 살다가 입적할 것이며, 다른 한 분은 환성 종사로서 이곳에 유배되어 살다가 입적하게 될 것이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환성 스님은 임제종臨濟宗의 선지禪旨를 철저히 주창한 선사였으며, 조선 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문喚醒門의 시조이자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다.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체정體淨-상언尙彦 등으로 연결된다.
스님의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喚惺詩集 1권이 현존한다. 문인은 33명이 있다. 세속 나이는 66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