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1.
이번에는 선재 동자가 보현보살 만나는 장면을 소개할 차례이다. 선재 동자는 이제 보현보살을 만나 화엄경 수행 지위의 최고인 묘각의 경지를 체험한다. 화엄경이 모두 8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제80권에서 문수의 안내로 마지막 보현보살을 만나게 된다. 보현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대목을 전래의 화엄 교학에서는 ‘현인광대상現因廣大相’이라고, 전체의 대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즉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그런 수행이 얼마나 넓고 큰지를 선재에게 알려주는 대목이라는 뜻이다. 수행이라는 원인이 있어야, 깨달음이라는 결과가 있는 불교의 기본적 논리가 대승 경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선재 동자가 소위 불교 최고의 종교체험인 묘각妙覺을 체험하는 이곳은, ①첫째 보현보살의 몸을 보고 이익을 얻는 대목도 있고, ②둘째 이마를 쓰다듬어 이익을 얻는 부분도 있고, ③셋째 수행의 길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보여 주는 대목도 있고, ④넷째는 작용의 끝이 없음을 관찰하게 하는 대목도 있다.
2.
보현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선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를 소개한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평범한 중생들이 불보살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의 일종이기도 하다. 늘 그랬듯이 운허 스님의 <한글대장경> 번역을 인용한다.
“이때 선재 동자는 여러 감관을 거두어 일심으로 보현보살을 보려고 크게 정진하며 마음이 물러가지 아니하였고, 넓은 눈(普眼)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여러 보살을 관찰하면서, 보이는 것마다 보현보살의 뵈옵는 생각을 지었으며, 지혜의 눈(慧眼)으로 보현의 도를 보니, 마음이 광대하기 허공과 같았고, 크게 가엾이 여김이 견고하기 금강과 같았으며, 오는 세월이 끝나도록 보현보살을 따라다니면서 찰나찰나마다 보현의 행을 순종하여 닦으려 하였고, 지혜를 성취하고 여래의 경지에 들어 보현의 지위에 머물려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감관을 거두어 일심으로 보현보살을 보려고”라는 구절을 주목해보기로 한다. 감관을 거둔다는 뜻은 눈이나 귀나 코나 나아가 피부 등에서 감지되는 모든 감각 내용을 차단한다는 뜻이.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그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고, 나아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고 그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다. 그저 보현보살을 보겠다는 그 마음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소위 마음 집중이다. 사무치는 염원을 말한다. 기도도 그렇게 해야 성취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위의 인용문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보이는 것마다 보현보살의 뵈옵는 생각을 지었으며”라 한 뜻은 일구월심으로 보현보살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현보살이 어떻게 서원을 세우고 어떻게 중생을 구제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보현보살이 실천했던 수행을 잊지 않고 나도 그렇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사무치는 것이다. 이것이 보현보살을 만나는 길이란다. 결국은 거룩한 사람의 삶을 생각하며 그의 삶을 나 자신도 그렇게 살아보려는 노력, 그것이 결국 거룩한 사람을 만나는 방법인 셈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수행이고 방법이다.
3.
이렇게 일구월심으로 보현보살 만나기를 생각했더니 드디어 만나게 된다. 그 장면을 <한글대장경>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 선재 동자가 보니, 보현보살이 여래의 앞에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보배 연꽃 사자좌에 앉았는데, 모든 보살들이 함께 둘러 모셨으며, 가장 특수하여 세간에 짝할 이가 없으며, 지혜의 경계는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헤아리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려워 삼세 부처님과 평등하며 모든 보살들이 살펴 볼 수 없었다.”
이상은 보현보살 몸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작다고 생각되는 털구멍(毛孔)을 사례로 설명하고 있다. 그중 일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 보니, 보현보살의 몸에 있는 낱낱 털구멍에서 모든 세계의 티끌 수 광명 구름을 내어 법계와 허공계의 모든 경계에 두루하며, 모든 중생이 괴로움과 근심을 멸하여 보살들이 매우 환희하게 하였다. 또 낱낱 털구멍에서 모든 부처 세계의 티끌 수 같은 갖가지 빛 향 불꽃 구름을 내어, 법계와 허공계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대중이 모인 도량에 두루하여 널리 풍김을 보았다. 또 낱낱 털구멍에서 모든 부처 세계의 티끌 수 같은 여러 가지 꽃 구름을 내어 법계와 허공계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대중이 모인 도량에 두루하여 묘한 꽃들의 비내림을 보았다.”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다. 듣는 이의 입장에서 읽으면, 아무리 미세하고 하찮음 속에서도 부처님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서만 부처님과 보살님의 거룩함을 찬송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어느 장소에서나 부처님이 계신 듯이 행동하고 말하자는 주문이기도 하다.
진리란 멋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힘들게 살아가는 빈한한 그런 속에도 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도 아니요, 더구나 남의 처지를 무시할 것도 아니다. 나아가 출가해야만 불교를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속이 더러운 것도 아니다. 처지와 형편을 탓하지 말고,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일구월심으로 불보살님 뵙기를 염원하는 것이 수행의 도량이다.
4.
이상에서 털구멍 이야기를 인용해보았는데, 미세한 한 곳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 거기에서 모든 게 나온다는 화엄의 서술 발상이 드러난다. 작은 하나의 모공에서 무수한 그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상은 작은 하나에서 다양한 많음이 나오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이하는 그 역방향으로 무수한 많음이 작은 하나로 들이는 것을 보여준다.
“보현보살의 몸의 부분마다 낱낱 털구멍에, 모두 삼천대천세계의 바람 둘레(風輪)·물 둘레·땅 둘레·불 둘레와 바다와 강과 여러 보배산인 수미산·철위산과, 마을·영문·도시와 궁전, 동산과 모든 지옥·아귀·축생·염라왕 세계와 천룡팔부와, 사람과 사람 아닌 이와, 욕심 세계·형상 세계·무형 세계와, 해·달·별·바람·구름·우레·번개들이 있음을 거듭거듭 보며, 낮과 밤과 달과 시간과, 해와 겁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심과 보살의 모임과 도량의 장엄과 이런 일을 모두 분명하게 보았다.”
미세한 하나에서 무수한 다양함이 생겨나는 것을 보여 주는 반면, 이제는 역으로 다양을 하나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전자는 ‘냄(出)’이고 후자는 ‘들임(入)’이다. 화엄의 교학이 화엄경의 이런 대목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출입이 자재하고 무궁무진한 것이 이 세상이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온 세계를 담을 수 있다. 세간의 무수한 사물이나 사안 하나하나 속에도 온 세계의 이치가 담겨 있다. 이것을 굳이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물리적 세계관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듯하다. 작은 하나의 선행으로도 온 세상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니 작은 선 하나라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한마음을 어떻게 먹느냐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더 나아가 세상을 구제하고 바꾸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보아왔다. 마음속 한구석에 살짝 깃들었던 상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상대의 작은 일에도 크게 화를 내고 그를 공격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5.
보현보살의 몸 중에서도 매우 미세한 모공毛孔을 사례로 이렇게 ‘일다一多의 무궁무진한 상호 연기’를 선재 동자는 배운다. 이런데 이런 배움의 일은 이 세계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무수한 세계가 다 그렇다는 것을 보여, 지금 보현을 통해서 알려주는 이 화엄의 진리가 보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항상함을 설명한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이 비로자나여래의 처소에서 이렇게 신통한 힘을 나타내는 것같이 동방 연화덕蓮華德 세계의 현수賢首부처님 처소에서 신통한 힘을 나타내는 것도 그러하였으며, 현수부처님 처소에서와 같이 동방의 모든 세계에서도 그러하고, 동방에서와 같이 남방·서방·북방과 네 간방과 상방·하방의 모든 세계의 여러 처소에서 신통한 힘을 나타냄도 모두 그러한 줄을 알 것이다.”
불교에서는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그렇게 수많은 세계 중의 하나이다. 이런 사바세계를 교화하는 주인공은 석가모니이시고, 지금 화엄경이 대상으로 하는 세계는 화장세계인데, 화장세계를 담당하는 교화의 주인공은 비로자나여래이시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보다시피, 다른 여러 세계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순간의 한 마음, 작은 하나의 선행이라도, 그곳에서 무수한 공덕이 나온다. 그러니 작더라도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역으로 마음속 아무리 미세한 원망이라도, 거기에서 심지어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도함도 나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