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진묵겁전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이었건만
위도중생현세간爲度衆生現世間하셨네.
위의덕상월륜만威儀德相月輪滿하사
어삼계중작도사於三界中作導師이시니라.
『무량수경無量壽經』에 “한 부처님 출현하시면 만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 한 법당 이룩되면 사바세계 안에 곧 극락정토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시겁래無始劫來, 끝없는 과거 이전에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는 곳에서 일찍이 깨달음을 이루셨지만, 우리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사바세계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32상相과 80종호種好의 위의를 구족하신 부처님은 허공에 있는 보름달과 같으시고,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큰 스승이시라는 찬탄의 게송입니다.
오늘은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백중 우란분재 49일기도 초재일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백중 우란분재일은 하루 지내는 일이 일상적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3일기도를 지내기도 하고 일주일 기도, 3·7일기도로 늘어나더니 모든 사찰에서 49일간 지장기도를 지내고 있습니다. 49일간 모시는 지장기도는 우란분재일이 부처님오신날, 출가일, 성도일, 열반일의 불교 4대 명절에 이어 5대 명일로 중요하게 여기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유래는 목련존자가 삼악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서 하안거 자자일에 설판재자가 되어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며 제사를 지낸 법회를 2,600년이 지나온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의식의 날입니다.
모든 이에게는 네 가지 고독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 죽을 때, 고통스러울 때, 육도를 윤회할 때, 혼자서 갈 수밖에 없는 고독함이 있습니다.
태어난 이는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은 아닙니다.
죽음 뒤에는 반듯이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생生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면 반드시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생경本生經』에, “가족의 죽음은 곧 우리들 자신 한 부분의 죽음을 뜻 한다.”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연습이라 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기도 합니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그 죽음만은 틀림없는 매듭이기 때문에 보다 더 진지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다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2567년 전, 열반하실 때 아난존자를 비롯한 제자들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자, 부처님께서는 “내가 떠남을 보고 죽음으로 알지 말라. 열반은 죽음이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열반涅槃은 교리적으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번뇌를 끊어 버리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은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하셨습니다.
죽음이란 숨 한 번 안 쉬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죽음이란 4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육신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지혜입니다.
그 육신은 떠나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떠난 후에 내가 말한 이 가르침이 곧 그대들에게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나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 지옥에서 받을 중대한 업業도 이 세상에서 가볍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볍게 받을 업도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무겁게 받아야 하는 그 이치를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며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비례대표처럼 혼자만 절에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불자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불교는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불자라면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수행에 대해 『햄릿』에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의 완성이다.
그것은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도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장부의 살림살이”라 했습니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면 잘못도 이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중국의 루쉰도 『고향』이라는 글에서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잔디밭을 밟고 다니면 거기가 곧 길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입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또 한 사람 걸어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치를 보기 위해서는 육안도 있고 천안도 있고 혜안도 있고 이치의 눈도 있고 깨달음의 눈도 있습니다. 안목이 있는 불자라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려 애쓸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보이는 것이 모두가 세상이치요, 들리는 것들이 다 본문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 합니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움은 내가 나와 가까워지고 내가 가족과 가까워지고 내가 이웃과 가까워지며 내가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는 내려놓을 줄 아는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 그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나만의 여행인 줄 알아야 합니다.
서양의 철학자이자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글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다.
내가 거쳐 온 수많은 여행은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당신을 발견 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당신 역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도반, 가족, 이웃과 늘 함께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미타경阿彌陀經』의 법문 한 구절 전합니다.
“사리불아,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며, 그 가운데는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오른 보살들이 수없이 많아서 셈과 비유로는 헤아릴 수 없고, 다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아승지로 말할 뿐이니라.
사리불아,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서원을 세워 저 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할 것이니, 가서 나기만 하면 이렇게 으뜸가는 착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까닭이다. 사리불아, 조그마한 선근이나 복덕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가서 태어날 수 없다.
사리불아,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미타불 명호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을 아미타불 명호를 가져 부르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산란치 아니하면 이 사람의 목숨이 마치려 할 때에 아미타 부처님이 거룩한 대중들과 나타날 것이니, 이 사람 목숨이 마칠 적에는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고 곧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날 것이니라.
사리불아, 나는 이러한 이로움이 있는 줄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어떤 중생이나 이 말을 듣거든 마땅히 저 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할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