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배우는 불교
바람을 품고 세상을 끌어안은, 팽나무
홍성범
숲해설가
2026년 올 여름은 그 어느 해 보다도 무더워 남도의 푸른 바다와 시원한 바람이 더욱 그리웠다.
한반도의 남쪽 바다, 억척스러운 갯바람이 그칠 날 없는 제주와 남해안 마을의 어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거대한 팽나무다. 육지 깊은 곳에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가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담당할 때, 짠물 흩날리는 해안가와 거친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포구에서는 오직 팽나무만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제주에서는 이 나무를 ‘폭낭’이라 불렀고, 남해안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포구나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칭했다. 고기잡이를 나간 아비와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던 작은 포구마다 팽나무는 어김없이 한 그루씩 서서 든든한 이정표이자 파도막이가 되어주었다. 소금기 머금은 갯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뿌리를 내린 팽나무는 남도 사람들의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과 참으로 닮아 있다.
팽나무의 생김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 그 어떤 나무보다 품격 있고 우아하다. 느티나무처럼 웅장하면서도 특유의 매끄러운 잿빛 수피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노신사의 피부처럼 단정하다. 줄기는 기묘하게 틀어지면서도 전체적으로 기막힌 균형을 이루고 사방으로 넓게 뻗은 가지들은 조화롭다.
봄이 오면 수줍은 은빛 꽃을 피워 소박한 멋을 내고 가을이 되면 콩알만 한 열매를 노랗고 붉게 찌워낸다.
이 조그마한 열매는 아이들의 좋은 놀이 재료가 되었다. 대나무통 양쪽에 팽나무 열매를 꽉 밀어 넣고 대를 밀어 올리면, 공기 압축으로 인해 ‘팽!’ 하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열매 총알이 튕겨 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던 그 ‘팽!’ 소리에서 나무의 이름이 유래했다니 팽나무는 태생부터 민중의 삶과 유쾌하게 맞닿아 있던 셈이다.
신화와 역사 속의 팽나무
팽나무는 단순한 식물 이상의 존재였다. 우리 민속 신앙과 역사 속에서 팽나무는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신성한 통로이자 ‘당산목堂山木’이었다.
특히 제주도 신화와 민속에서 팽나무는 신성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제주의 마을마다 자리 잡은 ‘본향당’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폭낭이 서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 나무에 신이 머문다고 믿었으며, 나무 아래에 알록달록한 실과 천을 걸어두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풍어를 빌었다. 바다로 나간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 길을 잃었을 때, 언덕 위에 우뚝 선 거대한 폭낭은 집으로 돌아오는 영혼의 등대 역할을 했다. 제주 사람들에게 폭낭은 마을의 뿌리이자 신령스러운 어머니였다.
동학농민혁명이나 제주 4·3 사건 같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 현장에서도 팽나무는 침묵의 증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사를 논하던 민주적인 공론장이자, 때로는 아픈 역사의 풍파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눈시울 적시며 지켜보던 버팀목이었다. 팽나무는 민족의 기쁨과 슬픔, 풍요와 빈곤을 마다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으며 민중과 함께 숨 쉬어 왔던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팽나무들
한반도 곳곳에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저마다의 이야기와 자태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팽나무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대표적인 명목名木들을 살펴본다.
먼저 창원 북면 동부마을의 팽나무다.
얼마전 드라마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팽나무는 나지막한 산등성이 위에 홀로 우뚝 서 있다. 수령 약 500년으로 추정되며, 사방으로 넓게 벌어진 가지와 매끄러운 자태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나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오랜 세월 동부마을 사람들의 쉼터이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대표적인 당산목이다.
바람의 섬 제주를 대표하는 팽나무 중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의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세월의 고풍스러움을 자아낸다. 또한 거친 갯바람을 맞으며 낮게 낮게 가지를 뻗은 가파도나 우도의 팽나무들은 육지의 것과 달리 키가 작고 옆으로 웅장하게 퍼져 있어, 바람에 순응하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제주의 생명력을 시각적으로 증명해 준다.
전라북도 고창 수동리의 팽나무 역시 단정하고 균형 잡힌 수형으로 손꼽히는 천연기념물이다.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신목으로 추앙받아 왔으며, 늦봄 잎이 피어나는 모양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년과 작경을 점치던 민속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경북 예천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세금을 내는 팽나무' 황목근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 앞으로 토지를 등기해 주어 스스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 토지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세금을 내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팽나무가 단순히 식물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어른으로 대우받았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다.
거친 풍파를 이겨내는 팽나무의 삶의 지혜
팽나무가 이토록 오랫동안 남도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연함’과 ‘상생’이다.
바닷가의 강력한 태풍과 소금기 머금은 바람은 강한 나무일수록 오히려 부러뜨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팽나무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가지를 유연하게 굽힐 줄 안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 바람의 결을 따라 몸을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지켜낸다. 억척스러운 바닷바람에 가지들은 세월이 흐르며 기묘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고난을 훈장으로 바꾸어낸 팽나무만의 삶의 궤적이다.
또한 팽나무는 자기 혼자만 우뚝 서지 않는다. 넓고 울창한 그늘을 만들어 볕에 지친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가을이면 달콤하고 붉은 열매를 맺어 새와 작은 동물들에게 소중한 양식을 대접한다. 열매를 먹은 새들은 멀리 날아가 팽나무의 씨앗을 퍼뜨려주니 팽나무는 온 세상과 소통하고 나눔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번성시켜 온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층 빌딩과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빠른 속도와 효율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문득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칠 때, 남쪽 바닷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든든한 팽나무를 떠올려본다.
거친 바람이 불어올수록 더욱 깊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는 팽나무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불안과 변화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침묵의 가르침을 준다.
삭막한 도시의 삶 속에서 나만의 '팽나무' 한 그루를 마음속에 심어본다.
타인을 위해 너른 그늘을 내어주고 세상의 어떤 세찬 바람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포용력을 지닌 팽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