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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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의 예술혼 되살아나길
김주일 / 현대불교신문사 취재부장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9월 16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첼리스트 고봉인(22)씨가 지휘자 정치용(50)씨에게 급히 신호를 보낸 뒤 연주를 중단했다. 연주도중 네 개의 현 중 마지막 줄인 A현(‘라’음을 내는 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연주하던 첼로 협주곡은 작곡가인 윤이상씨가 2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기억을 되짚어 만든 곡이다.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모든 구절에서 윤이상의 고통이 느껴진다”고 말했던 고씨는 한 음 한 음을 처절하고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 열정 때문일까? 결국 1악장을 시작한 지 5분 만에 첼로가 이를 견디지 못했다. 줄을 갈고 다시 등장한 고씨에게 2000여 관객은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일부에선 기립박수를 치는 이도 눈에 띠었다. 한국 현대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 현장에 있다는 자체가 자랑스러웠고 감동스러워 나는 한동안 객석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2007 윤이상 페스티벌’의 개막 연주회장에서의 일이다. 윤이상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이 페스티벌은 이날의 개막 연주를 시작으로 11월 10일까지 계속된다. 윤이상의 가장 절친한 음악적 동료인 프란시스 트라비스는 이날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 아악이 꽃을 피웠던 도시를 그린 ‘낙양(洛陽)’을 지휘했다. 관악기의 바람 소리와 정적인 이미지가 인상화처럼 펼쳐졌다. 이 연주가 끝난 뒤 “한국에서 남편의 곡을 들은 느낌이 어떠냐”고 질문하자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80) 여사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4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이 여사는 “그걸 말로 하기가…”라며 끝을 맺지 못하다 연주가 모두 끝나자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이번 페스티벌은 윤이상을 주제로 한 음악제 중 가장 큰 규모다. 서울과 평양 그리고 베를린 등을 오가며 연주자들이 윤이상 선생의 숭고한 음악정신과 조국애를 기리는 축제다. 특히 올해는 작곡 콩쿠르인 국제 윤이상 음악상이 만들어졌다. 총 23개국 작곡가들이 91개 작품을 출품했다. 9월 15일 열린 결선에서 상금 2만 달러의 대상은 중국 작곡가 왕린(31)이 차지했다. 윤이상의 음악과 닮아 있다고 여기는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늘어진 시계)’에서 영감을 얻은 곡으로 응모했다.

베이징 중앙음악원 출신인 왕린은 16세에 윤이상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하고 그의 세계에 매료됐다고 한다. 2001년 음악원 졸업 논문 주제 역시 윤이상의 작품세계였다. 
윤이상 평화재단의 박재규 이사장은 올해를 “윤이상 음악이 대중속으로 다가가는 원년인 특별한 해”로 지칭한다. 가장 큰 규모의 음악제 개최와 음악상 제정, 앙상블 창단뿐 아니라 이수자 여사의 초청까지 뜻 깊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단은 이번 페스티벌 이후 매년 가을 시즌(탄생일 9월 17일~서거일 11월 3일)에 윤이상 음악회를 꾸준히 개최할 계획이다. 이뿐만 아니라 윤이상의 전 작품 녹음, 윤이상 아트센터 건립도 추진 중이다. 윤이상의 삶을 주제로 한 영화도 나올 것으로 보여 그의 삶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기대되고 있다.


취재현장에서 만나기전 필자는 윤이상의 흔적들을 대학교 2년 때인 1990년에 가장 처음 만났다. 유독 나그네를 잡아끄는 도시 독일의 베를린에서였다. 유럽배낭 여행 중 평소 존경하던 음악가 윤이상과 문학가 이미륵의 체취를 만나기 위해 베를린을 방문했었다. 베를린은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앓고 있는 한국의 이방인에게 가족과 같은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당시 무너진 지 1년밖에 안된 베를린 장벽(1989년에 무너짐)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자 민족, 이념, 자유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떠올라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에도 유독 베를린만은 그런 묵직한 주제들을 화두로 던져 주었다.

필자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그나사우거리(Nassauische Straβe 6번지)」를 걸어 「국제 윤이상 연구소」를 찾아갔다. 고색창연한 한 아파트를 올라가 벨을 누르자 한 남자가 나왔다. 연구소 책임자인 볼프강 슈파러(Walter- Wolfgang Sparrer)다. 음악학자이자 미학자이고 연주가인 그는 생전에 윤이상과 공저로 책을 내기도 한 윤이상 주의자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연구소에서 유독 눈길을 끈 것은 한쪽 빈 벽에 붙어 있는 강서고분벽화와 만다라 그림의 사진들이었다.

볼프강은 윤이상 선생에 대한 칭찬부터 말을 시작했다. 독일 교과서에도 등장했을 만큼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은 윤이상이 1966년 ‘예악’을 도나우싱겐 음악제에서 초연 한 것은 당시로서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유럽의 현대음악은 벽에 부딪히고 있었고 방향 없는 추상성과 철학 부재의 실험성에 시달려 그야말로 기진맥진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때 나온 윤이상의 곡은 하나의 빛이었고 출구였다. 

일예로 베를린 청년들 중에 피카소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윤이상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라고 했다.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 등을 통해 나온 그의 음악들은 하나같이 동양의 신비로 가득한 것들이었다고 볼프강은 설명했다.

한 가지 의외의 말을 그에게서 들었다. 동백림 사건으로 고문과 감옥생활의 후유증으로 독한 약을 한 웅큼씩 먹으면서도 조국과 고향에 대해선 항상 좋은 얘기만 했고,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비록 윤이상 선생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낯선 이방인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윤이상은 정작 평생의 꿈이었던 자신의 고향에는 돌아오지 못했다. 「조국에 대한 연서」라는 글에서 윤이상은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다.
“…귀국하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의 흙을 만지게 된다. 그때 그 흙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2007년 9월 10일 그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40년 만에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이튿날인 9월 11일 서울 삼청동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80)씨는 “40년 만에 고향땅을 밟아 기쁘다”고 소회를 밝힌 뒤 “윤이상 선생이 살아 있어서 함께 돌아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며 하지만 이번 방문은 선생 때문에 왔고 그분의 영령과 함께 온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정부에 요청하고 싶은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이수자씨는 “예술가 특히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요 행복이라고 생각 한다”며 “앞으로 150여곡 되는 선생의 작품을 연주하며 그분의 정신과 혼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수자씨는 9월 12일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예방하고 “윤이상 선생이 돌아가신 후 몇 년간 정말 힘들었는데 그 당시 많은 힘이 돼 주었던 불교계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선조 때부터 집안의 종교가 불교여서인지 독일에서 자라 현대 기독교식 교육을 받았지만 왠지 기독교가 멀게만 느껴져 40여 년 동안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외로움을 극복해 왔다”고 불교에 대한 소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수자 여사를 근거리에서 취재하면서 ‘얼마나 긴 세월동안 고통스러웠을까’ 취재 현장에서 잠시 상념에 잠긴 것도 지난날 베를린에서 만난 윤이상 선생의 흔적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번 페스티벌 기간 중 9월 18일 서울 삼성동 봉은사 다래헌에서 열린 윤이상 수고 문화재 지정 논의 관련 회의에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윤이상 선생의 친필 악보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 청장은 또 “음악 부문에서 문화재 지정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가급적 이른 시기에 위원회를 구성,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 판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이 그동안 윤이상 선생이 받은 고초와 맞바꿀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지켜져 윤이상 선생의 예술적인 명예 회복은 물론 국내외에 더 많은 이들에게 윤 선생의 위대한 예술적 혼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발원한다.


<윤이상은?>(1917~1995)
1917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한 윤이상은 일본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 등을 수학, 통영과 부산 등지에서 고등학교 음악교사를 지냈다. 1956년 프랑스를 거쳐 57년 베를린 음대에 유학. 1966년 도나우싱겐에서 「예악」을 초연하고 1972 년 뮌헨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을 공연. 1981년에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초연했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의 죄목으로 1심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고 베를린 예술대학의 정교수를 지냈다.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았고, 1998년 뉴욕 부르클린 음악원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에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