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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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곧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세계입니다
          정우(頂宇)스님 / 본지 발행인.통도사 주지.구룡사 회주


누가 나에게 종교(宗敎)의 본질(本質)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윤활유적인 요소와 비타민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문학에 비유한다면 시(詩)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소설(小說)이 무엇입니까? 한자로 그 뜻을 풀어본다면 적을 소(小)자에 말씀 설(說)자가 합쳐진 말로써, 작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몇 십 권으로 쓰여진 대하물이라 할지라도 소설은 작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시(詩)는 무엇입니까?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자가 합쳐진 말이 바로 시입니다. 즉, 사원에서 전해지고 사원에서 나누는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종교는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윤활유적인 요소와 비타민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종교는 진실해야한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러시아에서 나온 책을 읽다가 「침묵은 진실」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침묵과 금과 진실의 함수관계는 무엇이겠습니까?
흔히 순금을 99.99% 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0.01%의 이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금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에서 지향하고 종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진실이라는 말은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정직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친 말씀이 진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 인해 항상하고 일관된 성품인 상일성(常一性)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변덕과 시비와 분별력 때문에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내 자신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主宰性)에 반(反)하여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한결같지 못하다는 것 또한 충분히 인식할 수 있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전해 드리고 싶은 진실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크든 작든 모두가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되어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기도(祈禱)이고 정진(精進)이며 수행(修行)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에 앞서 선행(先行)되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싫증내지 아니해야 합니다. 「아이고 또 그 소리」 하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르침은 늘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思惟)해야 합니다. 즉, 세 사람이 길을 걷는데 한사람은 모범이 되는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두 사람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변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두 사람 모두가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범이 되는 사람은 본받으면 되고, 잘못 사는 사람은 경계를 삼는다면 그 두 사람 모두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르침을 따라서 능히 실천하는 일입이다. 배워서 알았다면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아는 만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보리심(菩提心), 즉 깨달음으로 회향해야 합니다.
다시 처음 명제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종교를 진실한 것이라고 말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불교를 믿습니까?
궁극적으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정직한 사람이 되어서 성실하게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두에서 침묵은 금이라고 했고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침묵 중에서도 무관심한 침묵은 형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일입니다. 남에게 욕을 하는 것도 관심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고, 흉을 보는 것도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으로 쓰러진 나무는 동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동쪽으로 쓰러진 것이고, 서쪽으로 쓰러진 나무는 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쓰러진다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비추어서 오늘의 우리 현실을 살펴보면 국민들이 사회에 너무도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시위문화를 예로 들어보면, 국민들이 꿈틀거리는 생기가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과거에는 조건 없는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가 속해있는 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좇아서 분출되는 표현들은 해도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고 국민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정치는 이래야 된다는 입장에서 조건 없이 모두를 생각하는 데모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들의 무기력증과 불감증에서 오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서 우리 사회가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이분화 되어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근본목적인 개시오입(開示悟入)의 정신을 우리 사회에 널리 구현시켜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품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미망(迷妄)을 깨뜨리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보게 하여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 현상 그대로가 본체(本體)임을 깨닫게 하고 그 길에 들게 해야 할 시기라는 말씀입니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 보면 「방에 여러 가지 물건이 있다고 해도 등불이 없이 어두움에 가리면 아무리 눈이 밝아도 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빛과 물건과 눈이라는 삼각관계가 합일점을 찾아야 물건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스스로가 내관사유(內觀思惟)하면서 항상 확인하고 다짐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침에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서 저녁에 생을 마감한다 할지라도 후생을 걱정할 일이 없게 되는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전개되고 비롯되는 것은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돗단배를 타고 표류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혜가 있어도 성현의 말씀을 좇아서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능히 선과 악의 뜻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적절치 못하거나 그것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무주공산(無主空山)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진실해야 하고 그 진실은 나의 입장에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댄싱섀도우를 본적이 있습니다. 댄싱섀도우는 1987년 구룡사에서 창단하여 지금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극단으로 성장한 「신시」에서 차범석 선생이 6·25를 배경으로 쓴 희곡 <산불>을 원작으로 해서 현대적 우화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세계적인 작가와 연출가, 그리고 음악가가 모여서 만든 작품이어서인지 음악도 좋고 내용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공연을 보면서 어른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그 작품이 오히려 어른보다는 어린 아이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를 내가 나를 들여다보면서 생각해 보니까 어른들은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 극단 대표에게 공연 전에 스토리를 자막으로 한 번 비춰줄 것과 음악이 나올 때는 노랫말을 자막으로 띄워줄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극단 대표에게 그렇게 일러주었던 이유를 《화엄경 입법계품(華嚴經 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재동자(善才童子)의 구법행(求法行)을 비유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선재동자가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는 숲 서다림(逝多林)에 모인 5백 명의 보살이 모두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성취하고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발심을 하여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시작으로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법을 구합니다. 그리고 천신만고(千辛萬苦)의 고통과 역경을 딛고 마지막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신만고의 역경을 딛고 마지막으로 만난 미륵보살은 선재동자에게 「진정한 보리심을 일으켰다면 처음 만났던 문수보살을 다시 만나면 지금 내게 묻고 또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중생심으로 생각하면 「구법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분이 문수보살이니까 천신만고의 노력을 안 했어도 될 일」이라고 후회를 하고 곧 맥이 풀릴 일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의 그 말씀에 단박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선재동자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구법에 대한 확신과 신념으로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인들은 「착하게 살면 손해만 본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착하게 살면 손해 보지 않습니다. 나눔을 통해서는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착하게 살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말을 선재동자가 단박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던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보조(普照)스님의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땅을 딛고 일어서야 될 때는 땅을 딛고 스스럼없이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와 힘을 가지고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에게는 그곳이 곧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