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규 / 작가
유난히 비가 많은 올해.
중부내륙고속도로 가을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떨린다. 비 내리면 떠오르는 온갖 상념 탓이다. 오곡이 익어가는 계절, 옆으로 스쳐가는 들판을 감상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현실. 잊자고, 잊자고, 자꾸만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보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온갖 거짓과 허망의 작태가 난무하는 이 나라 권력을 보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왜일까?
연일 시정잡배보다 못한 말들을, 그야말로 추한 말들만 골라서 입에 담는 어설픈 권력자의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할 말을 잃는다. 당사자는 정말 갓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에게까지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식(無識)의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리어 그것을 소신이라고 가장하여 뽐내는 일이다. 복권 당첨되듯 지역 이기주의에 눈이 먼 몽매한 유권자들의 표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고, 세상의 이치가 자기 뜻대로 된다고 믿는 우매함을 누가 고쳐줄 것인가. 그러하기에 자고나면 시작되는 텔레비전의 불륜 드라마도 모자라, 그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드라마가 권력 심장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 도심을 막고 악다구니를 하고 있는 시위대를 보면 역시 그 나라 정치란 그 나라 국민의 민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실감한다. 오직 자신들만의 이기를 위해 귀를 닫고, 눈을 닫은 사람들이 연일 아우성을 치고 있음에랴.
하기야 기독교가 들어와도 가장 극렬하고, 공산주의가 들어와도 가장 극악한 땅이 된 불행한 나라, 그것도 남북이 갈린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 그것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아무리 우리가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쳐도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를 둘러싼 냉전의 구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전쟁 한번 일으키지 않고도, 그 전쟁으로 인해 아직까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다.
반세기 이상을 부모형제 생사는 물론이고, 편지 한번 허용하지 않는‘우리 민족’이다. 그런데도 우리만큼 민족이니, 나라를 들먹이는 사람들도 없다. 여가 선용의 야구를 하는데도, 축구를 하는데도 애국가를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토록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반쪽 난 나라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살까?
자기 민족만을 내세우던 유대민족이 그 수많은 세월을 나라 없이 어떻게 살았고, 지금도  몇몇 열강의 동정심으로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름으로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여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지 헤아려 보아야 한다.
말끝마다 민족운운 하는 한줌도 되지 않는 사이비 정치인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날뛰는 장면은 코미디라도 아주 저질의 코미디다. 몇몇 발군의 기업들이 이룬 약간의 성과물로, 해외로 해외로 물밀듯 나가는 여행객들을 보면 속이 차지 못한 졸부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이미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차례를 모시는 것은 일부 특권층의 자기 현시욕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가구들, 그들 앞에 추석은 또 한 번의‘너희들만의 축제’일 수밖에 없다. ‘아프칸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요.’ 끝까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는 피랍 기독인이 울면서 한 말이다. 가소로움, 그리고 부끄러움, 오늘 그들의 자화상이 곧 우리 모두의 얼굴인 것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 나라 가을은 기실 모두 함께 모여 풍년의 축제를 여는 계절이다. 흩어졌던 부모형제와 친구들을, 그리고 잊고 있었던 고향의 산하에 흠뻑 취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작금, 우리의 가을은 굵은 알밤을 보고, 그야말로 쟁반 같은 보름달을 수확을 하기보다는 하루빨리 청소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널려 있다. 곳곳이 지뢰밭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뻔뻔하다 못해 정신병자적인 기질로 온 나라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어설픈 정치권력으로 하여 또 다시 한숨으로 차례를 모셔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가을은 왔고, 무성했던 낙엽이 떨어지는 지순한 이치를 믿고 또 다시 꽃피는 봄을 기약할 도리밖에. 시인 예이츠의 말처럼 햇볕에 수그린 그대 이마 위에 입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가을은 왔다. 우리를 사랑하는 긴 나뭇잎 위에,
보리단 낱가리속 생쥐 위에.
머리 위 산마가목의 나뭇잎이 눌었고
젖은 들 딸기의 잎도 눌었다.
사랑이 기우는 계절이 몰려와,
우리의 슬픈 마음도 지치고 피곤해.
정열의 계절이 잊기 전, 떠나리.
수그린 그대 이마 위에 입 맞추고 눈물 흘리며.
이제 이 비가 그치면 서리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겨울은 눈사태처럼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서둘러야 한다. 무너진 담장도 고치고, 비새는 지붕도 돌보아야 한다. 더불어 두꺼운 외투와 따스한 장작도 준비해야 한다. 눈보라를 뚫고 찾아올 친구와 이웃을 위해 당연히 향기 나는 차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준비를 하기 전에 조용히 앉아 기도부터 해야 한다.
거룩하신 부처님이시여, 사랑이 기우는 계절이 몰려와 우리의 슬픈 마음도 지치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그 가을과 겨울을 견디는 한없는 인내를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는 수많은 마군들에게 조용히, 아주 조용히 하얀 서릿발을 내려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