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화엄경 열두 꼭지
    시심불심
    시심불심
    불서
    선지식을 찾아서
    산사카페
    불교관리학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폐허가 된 조선불교학을 일으켜 세우다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백암 성총 스님은 성은 이씨李氏이고, 전라북도 남원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강李棡이고, 어머니는 하씨河氏이다. 1631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 법명은 성총性聰이고 호는 백암栢庵이다. 취미 수초翠微守初 스님의 법제자이고, 조선의 불교탄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한 상소문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왕에게 올린 백곡 처능白谷處能 스님의 조카 제자이고, 무용 수연無用秀演의 스승이다.
스님은 13세에 조계산曹溪山으로 출가하였고, 16세에 법계法戒를 받았으며, 1648년(인조 26) 지리산에 들어가서 취미 스님 밑에서 9년 동안 불경을 공부하여 그의 법法을 이어받았다. 1660년(현종 1)부터 순천 송광사松廣寺, 낙안 징광사澄光寺, 하동 쌍계사雙溪寺 등 여러 사찰을 왕래하며 많은 학승學僧들을 지도하면서 스님들의 교과서인 『치문緇文』 3권에 주를 달아 후학들의 지침서로 제시하였다. 불교경전 외에 외전外典에도 능통하고 시를 잘 지어 김수항金壽恒·정두경鄭斗卿·남용익南龍翼·오도일吳道一과 같은 당시 사대부들을 모두 불가의 벗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1681년(숙종 7) 6월에는 조선의 남쪽에 태풍이 불어왔고, 그로 인해 70여 명의 어민이 목숨을 잃는 등 전국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며칠 뒤 전라도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는 돌연 난파선 한 척이 표착했다. 그런데 배 안의 나무궤짝에는 불교 경전이 가득 실려있었고, 인근 바다에도 불경이 담긴 궤짝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나주 관아에서는 배 안에 있던 불경 궤짝들을 꺼내 중앙의 조정에 올렸다. 왕실창고에 보관돼 있던 불경들은 얼마 후 남한산성 개원사 등 사찰로 옮겨졌다. 
난파선은 대만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상선이었다. 당시 대만과 일본 사이에는 온갖 물품이 오고 갔으며 그 중에는 불경도 포함돼 있었다. 임자도에 난파한 배에 실렸던 경전은 명나라 말기부터 120여년에 걸쳐 간행된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었다. 가흥대장경은 중국에서 간행된 역대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여기에 수록된 전적이 무려 2195부, 1만332권으로 중국불교의 결정체였다. 일본에 건너가 황벽종黃檗宗을 개창했던 중국 출신의 선승 은원(隱元, 1592~1673) 스님의 뜻에 따라 제자들이 일본에서 가흥대장경을 간행하려 추진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대장경을 실은 배는 태풍을 만나 조선에 표류한 것이다. 경전을 담은 궤짝들 중 일부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많은 궤짝들이 바다 위를 떠다녔다. 영광 불갑사에 머무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총 스님은 곧바로 표류선이 있는 임자도로 갔다. 그곳에는 중국의 화엄학자인 섭기윤葉祺胤 거사가 1625년 간행한 『화엄경소연의초華嚴經疏演義鈔』’가 놓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명법수大明法數』·『회현기會玄記』·『대승기신론기大乘起信論記』·『사대사소록四大師所錄』·『정토제서淨土諸書』 등 190권이 발견되었다. 스님은 1681년부터 1696년까지 낙안의 징광사에 머물면서 이들을 5,000개의 판板으로 만든 뒤, 인성印成하여 징광사와 쌍계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화엄경소초』와 『회현기』의 합본 80권 간행에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다행히 당나라 판본을 얻었는데 바로 청량 징관 스님의 회소초會䟽鈔가 함께 들어 있는 것이라. 청량 국사의 손때가 아직도 생생한 채 평림平林 거사가 편집하고 유포하였도다. 만일 자기의 사사로움만을 생각하여 대중들과 함께하지 못했으면 어찌 남과 착한 일을 함께하였겠는가. 상자 속에 보관하고 널리 전하지 못했다면 중생들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다시금 목판으로 새겨서 오랫동안 전하려고 하니 문득 초학의 후손들을 위함이라.


성총 스님이 청량 징관 스님의 󰡔화엄경회편소초華嚴經會編䟽鈔󰡕를 간행하고 지은 글이다.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 할지라도 상자 속에만 있다면 보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스님은 목판에 새겨서 널리 간행하였다. 기사년(숙종 15, 1689) 봄에는 낙안 징광사澄光寺로 가서 󰡔화엄연의초華嚴演義鈔󰡕·󰡔대명법수大明法數󰡕·󰡔간정기刊定記󰡕·󰡔정토보서淨土寶書󰡕·󰡔영험록靈驗錄󰡕 등의 책을 간행하여 인천人天의 어두운 안목眼目을 틔워 주려고 애를 썼다. 당시 조선은 계속되는 전란과 자연재해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불교계 역시 전란과 굶주림에 계속되는 탄압과 수탈로 스님들이 환속하고 무거운 부역을 못견디고 도망다니고 있었다. 때문에 불교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다. 암울한 이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스님의 󰡔화엄경󰡕을 비롯한 불서 간행의 노력은 조선후기 불교학이 중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조선 불교학의 정립과 발전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스님은 화엄華嚴 중심 교학인 「원돈문」에 대한 보족補足으로서 󰡔대승기신론소필삭기회편大乘起信論疏筆削記會編󰡕과 󰡔청량화엄소초淸凉華嚴疏鈔󰡕 및 선지禪旨 참구의 󰡔경절문󰡕에 대한 󰡔치문경훈주緇門警訓註󰡕, 그리고 정토淨土 수업의 「염불문」에 대한 󰡔백암정토찬󰡕 내지 󰡔정토보서淨土寶書󰡕 등의 간행을 통해 삼문수업三門修業 기틀 형성에 기여했으며, 그와 관련된 수많은 불전佛典 간행에 힘쓴 홍법弘法의 종장宗匠으로서 당시 불교의 정체성 정립에 기여하였다. 성총 스님의 제자인 무용 스님도 스승의 불서 편찬을 적극 도왔다. ‘대명삼장법수’ ‘금강반야경간정기’ 등 수많은 판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무용 스님은 스승이 불서간행으로 조선의 불교를 일신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성총 스님은 자신을 돕는 무용 등 제자들이 화엄의 오묘한 현리玄理를 모두 터득할 수 있도록 『화엄경소연의초』를 직접 강설했다. 그런 뒤에야 『화엄경소연의초』의 방대한 판각작업에 들어갔다. 61살 되던 1692년에는 선암사 창파각에서 화엄대회를 열어 화엄학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했다.
스님은 경진년(숙종 26, 1700) 7월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로 들어가 7월 25일 밤 자정이 채 못 되어 홀연 열반에 들었다. 나이 70이었다. 스님이 열반에 든 뒤 연일 밤마다 상서로운 광명이 서리더니 7일째 밤 다비식火浴을 하는데 그 상서로운 기운이 더욱 커져 한 줄기 하얀 빛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마치 한 필의 하얀 비단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것 같았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그 광경을 보았다.
그 후 3일이 지난 뒤 영골靈骨을 수습할 때 소나무 가지 위에서 한 조각 영골을 얻어 그 절의 백호(白虎, 오른쪽으로 뻗은 산) 바깥쪽 높다란 봉우리 언덕 위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스님이 남긴 원고는 거의 10여 편에 이르지만 다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몇 편을 거두어 판목에 새겼는데 그 서문은 최상국崔相國이 썼다. 스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제자 중에 무용無用 대사와 석실石室 대사 등 23명이 여러 지방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여 사방의 산을 뒤덮었다.
스님의 비문은 쓴 김상복金相福은 다음과 같이 스님을 찬탄했다.


말세의 영재英才가 선문禪門에서 많이 나오고
마음은 염불하는 데 전념하고, 뜻은 따로 나누지 아니하였네.
법을 지키고 가르침을 전하여
잃은 것은 있으나 거짓이 없으니,
오직 이 총명한 스님을 대중이 존경하였네.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서 경전을 얻고, 그 보존에 뜻을 두어
용맹하게 비요秘要를 전하니 바로 보월寶月의 소론疏論이라
이에 지금 그것을 얻어 미혹함을 깨우치고 어두움을 깨우니
그 법 가운데에 업業은 크고 공은 두텁도다.
그 명성은 길이 생각하고 이를 잇는 법손이 있어
그 행적을 옥돌에 새기고, 내가 더불어 글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