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1.
화엄경은 현재 4종류의 버전이 있다. 셋은 한어로 번역된 것이고, 하나는 티베트어로 번역된 것이다. 물론 산스크리트어로 된 거도 있지만 일부만 남아있다. 그중에서 산스크리트어도 있고 한어도 있고 티베트어도 있는 것은 「입법계품」이 유일하다. 이제 필자의 연재는 「입법계품」을 할 순서이다. 「입법계품」는 선재동자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세상의 다양한 사람을 만난 수행 길을 이야기식으로 전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이 모두 53명이다. 불교계에서는 이들을 ‘선지식’이라고 부른다.
필자가 그간 화엄경을 읽어오면서 느낀 점은 이 경전은 「이세간품 제38」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세 덩어리로 묶여 지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전반-중반-후반이다. 물론 제1회의 보리도량 설법은 기본이니 바탕으로 두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제1회에서 설한 총 6품의 설법은 건축으로 치하면 대지大地 즉 하나의 ‘너른 마당’이다. 대지 위에 집이 세 채가 들어선 셈이다.
총 6품이 배치된 제1회는 화엄경 설법의 기초이고 바탕이다. 그 내용이 그렇다. 제1회에서는 부처님이란 어떤 분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생겼고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의 종류가 어떠한지를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향후 무슨 설법을 할지를 질문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흡사 학교 첫 수업 시간에 ‘오리엔테이션’하는 것과 같다. 첫 시간이라 진도는 안 나가지만 앞으로 어떤 주제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지 소개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2.
비유를 들어 시작했으니 화엄경 전체를 비유로 그 구조를 이해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너른 마당’은 마련되었다. 그 위에 집이 세 채 지어진다. 한 채는 제2회에서 제7회, 또 한 채는 제8회, 마지막 한 채는 9회이다. 끝에서부터 말하면 마지막 한 채는 「입법계품 제39」이고, 중간의 한 채는 「이세간품 제38」이다. 그러면 자연 처음의 한 채는 예측할 수 있다. 즉, 「여래명호품 제7」에서 「여래출현품 제37」에 이르는 긴 이야기이다. 총 31품이다.
세 채 중에서 넓이로 말하면 처음의 한 채가 가장 넓고 이야기의 내용도 그만큼 풍부하다. 그렇다고 그 집이 가장 화려하다든가 중요하다든가 편리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제각기 특징이 있다. 그러면서도 집 셋은 공통점이 있다.
먼저 공통점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간단하게 정리하겠다. 각 채 마다 모두 여섯 개의 방이 있다. ①믿음의 방, ②이론의 방, ③실천의 방, ④체험의 방, ⑤부처님 닮아가는 방, ⑥부처님 방. 이렇게 여섯 개의 방이 있다. 첫째 방에서 훈련을 마치고 다음 방으로 옮겨가면서 사람은 점점 훌륭해진다. 한 마당 위에 있는 세 채의 집이 내부 구조는 이렇게 동일하다. 또 중요한 공통점은 방이 여섯이라는 점 말고도 모든 이야기끼리의 관계를 ‘인과론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점 또한 화엄경 읽는 독자는 주목하고 기억해 두어야 한다.
다음에는 세 채의 다른 점을 말해보기로 하자. 첫째 채에서는 ‘이론 방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둘째 채에서는 ‘실천 수행 방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셋째 채에서는 ‘사람 사는 세상 방면’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3.
이런 구조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화엄경은 앞뒤를 대조하고 번갈아 가면서 읽으면 이해가 더 잘된다. 같은 ‘①믿음의 방’이라도 세 채가 집마다 같은 주제로 설법을 하더라도 강조하는 각도가 제각기 다르다. 그러면서도 유사한 점이 있다. 이 정도로 지난 연재의 내용을 정리하고 선재동자가 등장하는 셋째 건물인 「입법계품」 이야기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먼저 전체적인 얼개를 소개하기로 한다. 많은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외워두는 것이 필요하다.
「입법계품」 법회는 전통적으로 크게 두 단계로 나눈다. 첫째를 <근본법회>라고 하고, 둘째를 <지말법회>라고 한다. 나무로 비유하면 ‘뿌리’에 해당하는 것이 <근본법회>이고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 <지말법회>이다.
먼저 <근본법회>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첫 대목은 사위성 기수급 고독원에서 시작한다. 부처님께서 ‘사자빈신 삼매’에 드시니 세간이 모두 청정해지고 나아가 서다림이 드넓어지며 무수한 대중들도 몰려온다. 이 광경 본 보현보살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자, 부처님께서 미간의 백호에서 ‘삼세에 두루 비치는 법계문’이라는 광명을 놓는다. 기타 숲에 모인 이들이 모두 황홀해한다. 이 모든 광경을 본 문수보살이 찬탄하며 부처님께 인사 올리고 선주 누각을 나와, 온 대중을 모두 데리고 남쪽으로 향한다.
다음에는 <지말법회>를 소개한다. 선주 누각을 나온 문수보살은 차례로 인간의 도성과 마을을 지나다 마침내 복생성福生城에 도착하여 선재동자를 만난다. 그곳에서 문수보살은 선재에게 수많은 선지식을 만나도록 안내한다. 착한 선재동자는 문수의 가르침 대로 차례로 52명의 선지식을 만나 수행에 관해 묻는다. 그러면서 마음이 성장하고 수행이 깊어간다. 53번째 만난 선지식은 미륵보살인데, 서로의 만남이 끝나자 미륵보살은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다시 제자리가 되었다. 110개의 성을 거쳐 멀리 온 선재동자는 어디서 어떻게 문수를 만날지 난감해한다. 마침내 보문국이라는 나라의 수마나성에 도착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데 어디선가 손이 나와 선재동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문수보살이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리서, 경에는 110 유순이라는 먼 거리에서, 문수보살이 팔뚝만 ‘쭉- ’ 펴서 정수리를 만졌기 때문이다. ‘1유순’은 지금으로 치면 약 16Km 정도가 된다. 매우 부지런한 임금이 하루 동안에 돌아다니면서 정치를 살필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문수의 손이 사라졌다. 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문수를 찾으려 하다가 선재동자는 문득 수많은 세계의 그간의 지난 온 일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서 하염없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는 보현보살을 만나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보현을 만났다. 이에 보현보살께서는 선재동자에게 부처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준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끝을 흐린다.
세계의 티끌 같은 마음 헤어서 알고 剎塵心念可數知 찰진심념가수지
큰 바다에 물이라도 마셔 다하고 大海中水可飲盡 대해중수가음진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을 맨대도 虛空可量風可繫 허공가량풍가계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 못해 無能盡說佛功德 무능진설불공덕
위의 번역은 운허 스님이 시작한 <한글대장경>에 실린 80권본 화엄경이다. 법당의 주련에서도 볼 수 있고, 또 사시마지 불공 끝자락에서도 들을 수 있는 부처님 찬송 염불 곡조이다. 이 뒤로 보현보살은 선재동자에게 1게송을 더 말해주고 대하드라마와 같은 80권본 화엄경은 끝이 난다.
4.
그런데 기묘한 이야기가 다시 펼쳐진다. 많이 읽어보고 들어본 「보현행원품」이란 게 있다. 「보현행원품」 속에 담긴 이야기는 80권으로 한문 번역된 화엄경에는 없다. 40권으로 한문 번역된 화엄경 속에만 들어 있다.
위에서 소개한 게송이 끝나자, 40권본 화엄경에서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이제껏 이야기한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려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수행 10가지를 제시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선재동자는 그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현보살께 청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이야기가 보현보살의 10가지 수행과 서원 즉, ‘보현보살십대행원’이다.
화엄경이 원체 양이 많아서, 현실적으로 이 책을 모두 읽는다는 게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40권본 화엄경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는 즉, 제40권 속에 화엄경 전체를 요점 정리했다고 평가되는 「보현행원품」이 들어 있다. 독서인들의 수고를 덜어준다. 공감한 사람들이 40권으로 된 화엄경 중에서 제40권 한 권만 따로 떼어 책을 만들어 애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운허 스님이 최초로 한글 번역해서 널리 돌렸고, 이어서 광덕 스님도 그랬다. 지금은 ‘확-’ 퍼져서 만물상에 가도 살 수 있고, 전문 불교 서적은 말할 것도 없다. 「보현행원품」에는 유명한 큰스님들이 주석을 붙여서 해설했다. 대표적인 분이 청량 징관 국사이다. 국사께서 지은 화엄경 보현행원품 소는 조선 시대에도 ‘베스트쎌러’였다. 최근, 필자는 이 책을 번역하여 서울 한복판에 <불경서당>을 열어 무료로 대중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