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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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이 유학자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벽하 대우(碧霞 大愚, 1676~1763)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스님의 법명은 대우大愚이고 호는 벽하碧霞이다. 속성은 박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느 날 스님의 어머니는 푸른 새들이 어깨 위로 모여들고 푸른 노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뒤에 잉태하여 대사를 낳았다고 한다. 숙종대왕 2년(1676)이다. 스님은 뒷날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할 마음을 내었고 호 또한 벽하로 지었다.
스님은 조연照淵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화악華岳 대사에게서 경전을 배웠으며, 환성喚醒 대사에게서 선법을 이어받고 고압孤鴨 선사에게서 계율을 전해 받았으니 이들 모두는 서산 대사의 5대 법손이다. 예컨대 육신보살로 칭송받았던 화악 문신華嶽文信,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가졌던 설암 추붕雪巖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환성 지안喚惺志安 스님이다. 스님은 그만큼 학문과 수행에 있어서 하해와 같은 스승 복이 많았던 분이다. 이들 스승들은 대흥사의 12대 종사宗師스님들로 조선후기 팔도의 불교계뿐만 아니라 청허 휴정 스님의 선교학 수행과 그 정신을 선양하고 있었던 해남 대흥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기도 하다.
대흥사의 12종사는 청허 휴정 스님의 문도로 대흥사가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선교학의 요람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화엄경󰡕을 수학하고, 그 강회講會를 개최하여 전국의 스님들이 대흥사에 운집하여 선교학을 수학하는 팔도의 종원宗院으로 부상하는데 기여하였다. 대흥사의 12종사가 대흥사를 선교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면 대흥사의 12강사는 화엄학을 중심으로 한 강회를 통해 대흥사를 더욱 발전시킨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대흥사의 12종사와 12강사 스님들은 당시 대흥사와 조선불교계의 대표적인 고덕석학高德碩學과 경사經師들인 것이다. 1800년대 초반 찬술된 󰡔대흥사지󰡕는 이 스님들의 덕화德化를 남기고자 행적을 수록하였다.
특히 벽하 스님에게 경전을 가르친 화악 문신華嶽文信 스님은 특이한 이력을 지닌 스님이다. 스님은 원래 가래[鏵臿화삽]·괭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 배를 채웠으므로 비록 짚신을 삼아 파는 자일지라도 스님을 천하게 여겼다. 스님은 농사 기구를 팔아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는데 하루는 너무도 피곤해서 대흥사 상원루上院樓 밑에 이르러 짐을 벗어 놓고 쉬고 있었다. 때마침 그 누각에서는 취여삼우醉如三愚 선사가 대중들을 모아 놓고 󰡔화엄경󰡕의 종지를 강론하고 있었다. 이때 화악 대사는 누각 아래에서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닫고, 지고 있던 농기구를 같이 장사하던 친구에게 넘겨주고 누각으로 올라가 꿇어앉아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삼우 대사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의 소원을 허락하였다. 그날 사방에서 몰려와 강론을 듣던 대중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 마침 대둔사에는 토목 공사가 있었는데, 선사는 낮에는 도끼질과 벽 바르는 일을 도와주고, 매일 밤마다 주워 온 솔방울로 불을 밝히고 오경五更이 될 때까지 글을 읽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와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은 모두 뒤로 처지고 말았다. 스님은 대둔사를 떠나 여러 지방으로 구름처럼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선지식들을 참배하고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학문이 완성되자 마침내 취여醉如 스님의 조실에서 화악 스님을 인가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자 화악 스님의 문전에는 배우려는 사람들이 폭주하였다. 대둔사에서 강론 법회를 여는 날이면 모여드는 대중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사미沙彌들이 몰려들어서 대둔사의 모임에는 배우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벽하 스님은 기상이 높고 준엄해서 사람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었으며,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굽힘이 없이 의연함을 잃지 않고 정직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비록 사나운 호랑이가 목전에 나타나도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경교經敎를 공부하고 틈틈이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서를 섭렵해 두루 통달했다. 만년에는 선송禪頌을 즐겨 보아 그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일찍이 구곡 각운龜谷覺雲 스님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에 간간이 잘못된 곳이 있다고 말하면서 손수 붓과 말로써 늙음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바로잡아 나갔다. 일찍이 󰡔주역周易󰡕을 빌려다 읽으면서 설명한 내용이 본래의 뜻이나 가리키는 바가 다른 곳은 샅샅이 찾아내어 그 옳고 그름을 바로잡아 낱낱이 표시하여 읽어 볼 수가 없게 하여 돌려 보내니 책 주인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환성 스님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벽하 스님에게 지어 주었다.


동국의 큰 종장宗匠은       東國大宗匠 동국대종장벽하 장로가 바로 그분이네  碧霞長老其 벽하장로기서쪽 강 만 리 물을         西江萬里水 서강만리수한 입에 다 삼켰구나        一口能呑之 일구능탄지


환성 지안 스님은 벽하 스님이 조선시대 불교계의 선학禪學과 교학敎學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경전까지 섭렵했던 스님의 재주를 아꼈다. 스승 환성 지안 스님은 출가 이후부터 부처님의 경전[內典] 연구에 몰두하느라 아예 침식을 모두 잊기가 예사였다고 한다. 27세 때에는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 대사가 금산(金山,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갔는데, 모운 스님이 환성 스님의 학덕學德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탄복하고 수 백 명의 학인들에게 환성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1724년 금산사金山寺에서 큰 법회를 베풀었는데 대중들이 무려 1,000여 명이나 모인 일이 있었다. 스님의 행장은 당시 화엄법회가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비슷했고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때문에 환성 지안 스님은 벽하 스님이 불교계의 큰 대들보임을 알아보신 것이다.
한편 벽하 스님의 양미간에는 하얀 털이 나서 그걸 보는 사람들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스님의 얼굴 모양은 반듯반듯 모가 나서 쳐다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였으며, 그에게 참례하고 학문을 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부질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직접 붓을 들어 게송을 지었다.


인생의 삶은 타향에 잠시 몸을 붙인 것이요 生來寄他界 생래기타계 죽음이란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네  去也歸吾鄕 거야귀오향 오고 가는 흰 구름 속에                  去來白雲裡 거래백운리 터득한 일 평상平常함일세                且得事平常 차득사평상


시를 다 쓰고 붓을 놓고는 조용히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영조 39년(1763) 6월로 세속 나이는 88세였다. 벽하 스님에게 생사生死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어서 죽는다고 해서 특이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경전공부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교학공부와 함께 자신의 본성을 철저하게 더듬어볼 때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이 어느 것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먹고 자는 것과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후손들이 다비를 하여 정골頂骨 한 조각에서 사리 1과를 얻었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이 스님의 비명을 지었다. 문인들은 현암玄岩과 채미采微 등 네다섯 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