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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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萬行

승한스님 / 봉담선원장


만행萬行은 즐겁다. 만행을 하면 각양각색의 부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내 마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부처님은 대부분 낮고, 작고, 하찮고, 외진 곳으로부터 온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에서 오기도 하고, 폭설로 길 끊어진 외딴 산장에서 오기도 하고, 재래시장 국수집에서 오기도 하고, 빈 겨울 들녘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에게서 오기도 한다. 한적한 시골 기차역과 항구의 먼 등대 불빛에서 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부처님들은 내 마음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 이승길과 저승길을 넘나든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고단한 꿈을 꾼다. 나는 지금 이승인가? 저승인가? 내 삶은 지금 이승의 삶인가? 저승의 삶인가? 이승의 삶이 내 진짜 삶인가? 저승의 삶이 내 진짜 삶인가?
만행길에서 만나는 나의 부처님들은 그렇게 한결같이 외지고 작다. 나처럼 좀 어리부리 하고 좀 덜 떨어졌다. 이웃처럼 ‘이무럽고’ 다감하다.
절대고 속에서 단둘이 마주치는 부처님은 그렇게 내 친구가 되어주고, 길동무가 되어주고, 말동무가 되어준다. 길라잡이가 되어준다.


지난 가을 남녘 만행길에서 나는 또 나만의 부처님을 만났다. 이번 부처님은 잎 다 떨어진 우듬지에 까치밥 몇 개를 달고 있는 감나무로부터 왔다.
열차를 타고 익산으로 해서 전주와 남원과 곡성과 구례와 순천과 여수와 벌교와 조성과 득량과 보성과 능주와 화순과 광주를 거쳐 남녘 길을 한 바퀴 뺑 돌고 오는데 기찻길 옆 어느 한적한 오막살이 마당가에 털 빠진 새 꽁지처럼 잎을 다 떨친 채 ‘감나무 부처님’은 우듬지에 붉은 까치밥 몇 개를 달고 있는 ‘적정 삼매’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온갖 시름을 다 잊고, 온갖 번뇌 다 떨치고 울바자 끝에 물끄러미 서 있는 ‘감나무 부처님’의 모습에서 나는 유년의 나를 보았다. 젊은 날의 나를 보았다. 지금도 까치밥을 다 떨치지 못한 채 자식들을 위해 ‘쭈그러지고 마른 젖꼭지’를 내밀고 있는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았다.
내 마음의 부처님이 문득 눈물을 머금었다. 이승의 내가 어깨를 들먹였다. 저승의 나도 눈시울을 붉혔다.
흐느끼고 있는 내 마음의 불보살들 사이로 관음보살처럼 눈매에 순한 웃음기를 머금은 한 시인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타고 걸어들어 왔다.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 어느 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는 부처님의 사랑과 연민을 안고 내 마음의 울바자 사이로 다스한 가지를 뻗었다.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마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박재삼의 「한恨」


내 마음의 불보살이 그렇게 연민의 어깨를 들썩였던 것은 바로 그 ‘한恨’ 때문이었다. 원망과 분노와 절망으로 빚어진 ‘한’이 아니라, 자비와 순리와 연민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느껴운 열매’의 열반적정의 ‘한’이었던 것이다. 늙어서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쭈그러지고 마른 젖꼭지’를 자물리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홍시紅枾 같은 사랑과 자비의 ‘한’이자 연민의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내가 만행을 좋아하는 것은 그처럼 혼자만의 만행길에서 각양각색의 부처님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부처님과 보살들을 통해 내 안에 겨자씨만한 자비의 불성이라도 뿌리고 싶기 때문이다.
만행이 아름답고 즐거운 것은 그런 까닭이다. 고단한 만행길에서 이름 석 자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작고, 하찮고, 때로는 ‘서러운’ 모습으로 가장 순결하고 자비로운 불성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불보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삶의 북극과 남극을 바로 가리켜주고 있다.
올 가을엔 나도 저 남녘의 ‘감나무 부처님’처럼 우듬지에 까치밥 몇 개 달고 ‘내 전全 설움’으로, ‘내 전全 소망’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승길을 벋어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