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焚書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농사짓고 그릇을 굽고 고기를 낚는 사람들에게서도 받아들일 장점이 다 있는데 수많은 성현의 장점을 받아들여선 안 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왜 꼭 공자만을 배워 학문의 정통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명나라 시대는 공자 이외엔 일체의 학문이 ‘이단’으로 정죄되던 때다. 그 때에 대유학자가 이런 글을 썼다면 어찌됐을까. 불교국가인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 때 ‘왜 우리가 붓다의 진리만을 배워야하느냐’고 고승이 주장한 것과 다름없이 큰 파문을 야기했을 것이다.
요즘 나를 가장 사로잡은 인물이 이지(李贄, 1527~1602)다. 동양의 유·불·선과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사상과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그의 글은 장자가 말한 대붕의 날갯짓을 보는듯한 호쾌함이 느껴진다.
이지가 지은 책의 이름은 《분서焚書》. 자신의 책을 불태워도 좋다고 그렇게 지은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괴팍스런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유·불·선에 달통한데다 기독교까지 해박했던 이지는 2천 년 간 지탱해온 봉건적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격을 가한 사상적 이단아였다.
그는 60세가 넘어 산중으로 출가했는데, 결국 옥중에 갇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생을 마친 인물이다.
“왕양명 선생은 ‘거리에 넘치는 사람이 모두 성인이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이 곧 불성이니, 사람은 누구나 부처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모두 성인인 까닭에 성인께선 특별히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중요한 도리를 따로 갖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이 모두 부처인 까닭에 부처도 일찍이 중생을 제도한 적이 없었다. 중생의 상이 없는데 어디에 인상人相이 있으며, 도리道理의 상相이 없는데 어디에 아상我相이 있겠는가! 나의 상相이 없으므로 능히 자신을 버릴 수 있고, 타인의 상相이 없으므로 남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강요하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모두 부처인 것을 직접 보고 나면 자신의 선을 남에게 베풀어 서로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에 남과 더불어 착해질 수 있는데, 어찌 나 혼자에게만 선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겠는가.”
《금강경》의 구절을 들어 일체의 독선을 타파하고 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그가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여기는 주나라 시대의 예禮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 예는 사회의 질서를 잡는 구실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지는 명나라 말기, 수공업의 발전에서 생긴 사회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지배자가 민중의 요구를 묵살한 채 단지 그 반란의 진압에만 골몰한 것에 대해 시대의 문제에 대답하는 길을 찾아 고민했다. 그는 유·불·도의 가르침의 경계를 제거해 진실한 도를 찾으려 하였으며, 송학 이래, 양명학도 포함하여 ‘천리에 따르고, 인욕을 없앤다(存天理去人欲)’는 전통적 규범이 시대에 맞지 않는 허위에 불과하다며 상고주의尙古主義·경학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반봉건주의는 반도학자反道學者로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바로 인륜이며 만물의 이치니, 옷 입고 밥 먹는 일을 빼면 인륜이며 이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일들은 다 옷이나 밥 같은 종류인 까닭에 옷과 밥을 거론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자연스레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미 ‘평상심이 곧 도’라는 선禪의 주장을 간파한 논리다. 이지가 말하는 도는 곧 ‘사람 자신이 도’라는 것이다. ‘사람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사람’이라는 말처럼 그는 사람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예禮는 또 공자가 말하는 존비尊卑와 명분名分의 등급화된 제도가 아니라, ‘백성의 욕구에 따라 호오가 정해지고 자신의 욕심은 내세우지 않는 것을 예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민본주의적 태도는 그의 경전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대를 앞서갔으며 지배층의 눈치보다는 중생의 고통을 헤아리는 대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새로운 사고로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했던 이지의 주장이 좀 더 일찍 받아들여졌더라면 명은 곧바로 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지는 남녀평등관에 있어서도 시대를 앞서 있었다. 공자는 일찌감치 남존여비를 기조로 삼는 가부장제도를 가정의 근본 원리로 제시했다.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려우니,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라는 공자의 말은 그의 편향적인 여성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화근덩어리(女人禍水)’로 치부되었고, 여성과 소인배는 가까이해선 안 되는 존재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지는 남녀를 막론하고 그 덕행은 오직 언행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자는 무재주가 바로 상덕(女子無才便是德)’이란 당대의 주장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반박이다. 그는 또 여자와 소인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란 전래의 관념에 매담연을 위시한 몇 명의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남녀는 생리적인 차이에 불과할 뿐 능력에 있어서는 남성과 대등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누구는 브라만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천민으로 태어나서 존귀와 비천이 갈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덕행과 행위로서만 존귀와 비천이 갈린다’는 부처님의 논리와 같은 주장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풍속을 뛰어넘은 것으로 당시 사회로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몇몇 여성들과의 교유는 결국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을 암자로 꼬여내 불법을 강론했는데, 침구를 들고 와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라는 지경의 음해로 이어져 훗날 그의 죽음을 부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지의 종횡무진한 동서 사상의 경지는 그의 가문의 영향으로도 보인다. 그의 조상 중엔 페르시아 만을 오가며 무역을 하다가 외국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거나 이슬람교를 믿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중국의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해 하남·남경·북경 등지에서 줄곧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 요안지부를 끝으로 퇴직했다. 이지는 40세 전후 북경의 예부사무로 근무하던 중 왕양명과 왕용계의 저작을 처음 접한 뒤 심학心學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어 불교에 심취하고는 62세에 정식으로 출가해 절에서 기거했다. 그는 유불선의 종지가 동일하다고 인식했고, 유가에 대한 법가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소설과 희곡 같은 통속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평론 활동을 폈다. 유가의 정통관념에 도전하는 《장서》를 집필했고, 공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경전을 해설한 《사서평》을 출간했으며, 선진 이래 줄곧 관심 밖에 있던 《묵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다. 이렇듯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고 송명이학의 위선을 폭로한 그에게 세인은 양쪽으로 갈려 극단적인 평가를 부여했다. 결국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의 저작들은 명·청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 또한 횡행하고 있다.
그는 76세에 감옥에서 스스로 칼로 목을 그었는데, 이틀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제자가 이틀째 ‘아프지 않느냐’고 묻자 ‘아프지 않다’고 답하며 ‘세상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곧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