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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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량, 무명의 실체를 거르는 근기

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다람살라의 10월은 청명한 가을이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2)
는 10월과 11월로 예정된 미국과 일본의 전 일정을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취소하고 그의
두 번째 고향 인도에서 난민과 함께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수립된 다람살라 난민
사무소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더불어 학교 운동회와 개교기념일에 흥겨운 시기이다.
대만불자 1,000여 명이 다람살라를 찾아 달라이라마의 법회가 10월 3~6일 총 4일간 열리면서 다람살라는 다시 북적였다. 찬드라끼르띠의 「입중론」을 주제로 한 법회에 앞서 대만에서만 82명이 티베트불교로 출가를 하는 사미 사미니계 의식을 치렀다. 한국에서도 3명이 티베트불교로 출가를 하며 한국의 추석과 같은 날에는 포살법회가 열렸다. 법회 첫날 달라이라마는 마음의 평등심을 강조하며 야단법석을 맞았다.
숨을 고르며 내면의 감정 변화를 고요히 바라보는 것. 달라이라마는, “변화하는 마음을
알아차림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게 되면서 다양한 불교의 명상 수행법이 각계 각처에서 큰
공감대를 낳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현대의 전문 지식인들은 복잡다단한 마음의 감정들이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 아님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의 다양한 변화를 내면의 성찰로써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해갈수록 불교의 심오한 수행법과 가치는 점차 종교를 넘어서는 분야로 대입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고 설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21세기는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인류애의 가치를 보다 존중하는 고민의 시대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보였다. 사랑과 연민이 인간의 천성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어진 것이다.
골자는 이러하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소중히 대하라. 특정한 한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어 특별히 아끼는 것이 아닌 분별없는 사랑을 나누도록 해야 한다. 이 하나의
지구는 각기 다른 향과 맛을 지닌 사회라는 점. 70억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가치는 우리가 어떻게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한다. 이는 타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상식적으로 사유한다면 사랑과 연민의 나눔에는 나와 너의 경계가 따로 없다.
종교란 사랑과 연민을 통해서 인류애를 구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종교와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인류가 추구하는 공동의 가치는 구별이 없다. 오늘날 인간이 추구하는 인류의 물질적 풍요에 대해 종교는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오늘날 인류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다면 개개인의 일상은 그 사유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다. 동시에 싸움과 다툼이 빈번한 우리의 일상이 인류의 문제와 비교해 무척 사사로운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달라이라마는 옛 까담파 스승들의 말씀을 예로 들었다. 회자해 보건데 나를 둘러싼 자연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 그러하다.


여기 이 자리에서 설법을 하는 달라이라마는 불교의 비구 승려입니다. 꿈에서 조차나는 비구라는 생각을 놓지 않습니다. 달라이라마로서 법왕의 책임을 부여받은 때가 세속의 나이 16세입니다. 본인 스스로가 인도로 망명하기 이전부터 티베트의 왕권 체제를 민주화 하는데 많은 고심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1959년도에 인도에 망명한 이후 제도적으로 민주주의 정부 체제를 수립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마침내 2011년도에 정치적인 부분으로부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었습니다. 이로써 저는 종교인 달라이라마 본연의 역할에 보다 충실히 임하게 되었습니다.
상키아학파 수론학파 자이나교 불교 등이 모두 인도에서 발생한 것과 더불어 이웃의 종교로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 등이 생겨났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 간의 분쟁이 오랜 시간 있어 왔지만 인도의 종교는 유혈적 충돌이 없이 공존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 공통분모가 바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교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들 역시 사랑과 연민을 근본 사상으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라를 신앙하는 믿음의 형태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으로서 종교는 신중한 나의 선택보다 성장한 환경 때문에 타력에 의해 믿고 따르게 된 것을 인정하며 종교를 해석해야 합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말씀하신 법은 각기의 중생들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바른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궁극적인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헤아리고 일시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량함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실제로 창조주가 있어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이 창조 되었다면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요. 하나님은 본인의 자식을 사랑하는 존재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앙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 역시 사회에 공헌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에 우리는 공동의 관심사를 위해 그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가 다르다고 하며 다툼을 일으킨다면 과연 어떠한 이익이 있겠습니까. 저는 한 종교의
비구 승려 일인으로서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앞장서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나의 마음을 바꾸어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실천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지 단순히 스승의 말씀만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옳은 수행이 아닙니다. 스승의 법에 의지하여 의심을 통해 의문을 들고 사유하여 실천함을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동시에 거듭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무상 요가에서 다루는 위없는 스승이란 실상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상을 본 그 자리가 열반이며 이를 직시하지 못함이 윤회입니다. 인류가 나와 다름이 없는 같은 사람이라는 분별 체계는 없습니다. 마치 방금 만난 어린이들이 민족성과 종교, 인종과 같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어울림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나와 다름이 없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떠올림에 따로 특별한 수행이 필요치 않습니다.
「중론」 그리고 「사백론」과 더불어 「입중론」은 티베트불교의 논서 가운데 최고로 꼽습니다. 티베트에는 200질의 경과 100질의 논전이 현존하며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보존된 율장이 있습니다. 티베트의 역경사는 인도로부터 들여온 산스크리트어 원본에 대한 경의를 표함에 산스크리트어 원제를 함께 밝혔으며 혜학에 대한 귀의의 의미로 문수보살에게 예경을 올리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공함은 상변을 여의도록 하며 연기를 통해 의존하여 상호 발생함을 헤아려 단변을 여의게 합니다. 중관에서 중도에 들어감이란 근도 과의 중관을 의미합니다. 월칭보살께서는 중론에 입문하는 「입중론」을 논한 이후에 「현구론」으로 보다 논의를 심화하였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논서만을 참구하는 것이 아닌 시대사별 논서의 입장차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논사별 주장의 논의를 살펴 사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입중론」을 통해 자비심과 보리심은 둘이 아닌 씨앗임을 발견해 보려합니다.
보살은 보리심을 통해 부처를 이룹니다. 끊어야 할 바를 끊고 일체의 공덕을 두루 갖추어 가며 실상을 헤아리는 수행도를 따르려 합니다. 먼저 번뇌의 훈습인 소지장을 끊기 위해 주력합니다. 우리가 지닌 수많은 번뇌의 궁극적인 뿌리를 끊기 위하여 가장 먼저 무명의 실체를 분석합니다. 이 분석하는 과정에 필요로 한 것을 일컬어 자량이라고 합니다.
이 자량이 바로 지혜와 방편입니다.
그 시작이 자량도입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선지식을 만남에 대해 보만론에 이르기를 깨달음을 원하는 이는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켜 견고한 이타심을 바로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일체 중생이 무명을 끊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자비의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일으킬 준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