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조선후기 불교계에서 유행한 의식집인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에 수록된 「새로 여러 산문의 종사 반열에 든 종사를 청함(新入諸山宗師請신입제산종사청)」에는 조선시대 불교계를 중흥시키거나 불법을 지키기 위해 진력했던 고승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강주講主로 명성을 떨치신 풍담 의심楓潭義諶 대사”라고 하여 풍담 스님을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에 교학을 전한 스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불교의 선교통합과 발전을 열망했던 청허 휴정과 제자 편양 언기 스님의 서원이 풍담 스님에 와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풍담 스님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불교계를 회생시킨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의 법명은 의심義諶이고 호는 풍담楓潭이다. 속성은 유柳씨이고 통진(通津, 오늘날의 경기 김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어머니가 일찍이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였는데, 선조 25년(1592)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자라면서는 풍채가 빼어나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스님은 14세가 되자 집안 어른들 몰래 묘향산玅香山으로 들어가 16세에 출가하여 성순性淳 대사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아버지가 출가를 그만두게 하려고 애썼지만 스님을 붙잡을 수 없었다. 부처님과 지중한 인연을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풍담 스님은 출가 후 원철圓徹 스님을 뵙고 사집四集을 받아 배워 큰 뜻을 통달하였다. 이후 원철 스님에게 계戒를 받았으며, 묘향산으로 들어가 편양鞭羊 대사를 알현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편양 스님은 풍담 스님이 매우 총명하고 뛰어나 남다르다고 여겨서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편양 대사는 바로 청허淸虛 대사의 법을 이은 분이었다.
스님은 스승이 오로지 전해지는 오묘한 뜻을 모두 일러주니 마음으로 계합하고 신통하게 이해하여 조금도 막히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스님은 스승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은 이후 우리나라의 명산에 거의 다 석장을 세웠고, 남쪽을 순례하며 기암 법견奇岩法堅ㆍ소요 태능逍遙太能·벽암 각성碧巖覺性 스님 등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참례하며 그 깨달은 바를 질정하고 마침내 풍악산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도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고, 종풍宗風이 점차 진작되어 사방의 많은 스님들이 풍담 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스님은 원각圓覺의 깊고 오묘함과 화엄華嚴의 넓고 광대함이 번뇌의 바다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쳤고, 붓끝을 능숙히 다루어 나중에 깨닫는 이를 깨치게 하니 나그네가 돌아갈 곳을 얻는 것과 같았다. 스승인 편양 스님은 두 경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석과 소疏가 기준이 없이 산만하다고 여겼고, 또 많이 결락되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다듬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급기야 풍담 스님을 만나자 그것을 부탁하니 5~6년 동안 그 오류를 바로잡아 살피고 종지宗旨를 드러내며 밝혔다. 당시 공부하고자 했던 스님들에게 의심을 풀어주었으니 불교계의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스님이 해남 대흥사에서 큰 법회를 주관하였는데, 그 법회에 모인 대중들이 무려 250명이나 되었다.
스님은 온후하고 차분하여 바라보면 공경할 만했다고 한다.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은 스님을 만나보고는 존경의 예를 극진히 하였고, 스님을 알았던 유학자와 신료들조차도 방외方外의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스님은 후학들에게도 자애로워 잘 대우해주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쳐서 이끌고 도와주었다. 때로는 편안히 앉아 말없이 가르침을 보였고, 때로는 아주 자세히 분석하여 지도하였으니 그 기질과 성품에 따라서 방편의 도를 열었다. 그러므로 문도가 흥성하여 근래 가장 많았는데, 가르침을 받은 이가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이름이 알려진 이가 70여 인이나 되었다. 스님의 시와 게송 역시 맑고 우아하여 감상할 만했지만, 평소 지은 시를 모두 불에 던졌으니 구업口業을 짓는다 하여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선종과 교종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아마도 청허와 편양鞭羊 때 일 것이다. 여기 명백한 증거가 있다. 금강산金剛山 풍담사(楓潭大師)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금강경은 담무갈曇無竭에 머물으며, 임제臨濟의 법이 동쪽으로 온 후 마음을 전한 여러 부처가 있었다. 청허와 편양에 와서는 선종과 교종이 하나로 합쳐졌는데, (풍담)사가 전수 받은 그 법은 살도 아니고 뼈도 아니었다. 108곳의 사찰에 등이 켜지고 천만 봉우리에 달이 걸리니, 진여眞如 자성自性이 꺼지지 않고 항상 비추는구나. 화엄의 오묘한 이치는 교화의 근원을 열어 밝히니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서 어리석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도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중에서)
이능화는 금강산에 있는 풍담 스님의 비문을 보고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심했던 조선불교에 선교통합이 이루어졌던 때가 청허와 편양 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풍담 스님은 조선불교의 선교통합이 이루어졌던 최초의 결정체이자 상징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스님을 해동 화엄종華嚴宗의 중흥조이자 대흥사 12종사 가운데 제1대 종사라고도 한 것이다. 대흥사가 조선후기 불교계의 종원宗院이라는 명예는 풍담 스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스님은 현종 6년(1665)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서 세상을 떠나려 할 무렵에 게송 한 편을 읊었다.
奇恠這靈物 기괴저영물
臨終尤快話 임종우쾌화
死生無變容 사생무변용
皎皎秋天月 교교추천월
신기하여라. 이 영물靈物이
임종에 더욱 상쾌하다니
나고 죽음에 변한 모습 없으니
가을 하늘에 달만 밝게 비추네
당시 스님의 세속 나이는 75세이고, 법랍은 58년이었다. 돌아가시던 날 안색이 평소와 같았다. 그의 제자들이 영골靈骨을 받들어 은색銀色 사리 5과를 얻어 부도를 건립하고 탑비塔碑를 세웠다.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이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세운 비문을 지었고,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백화암에 세운 편양당의 비문을 지었으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백화암에 세운 서산 대사의 비문을 지었다. 이씨 3대가 서산 3대의 비문을 지었으니 좋은 인연의 소중함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