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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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등을 흔적 없이 이어가다

해운 경열(海運敬悅, 1580~1644)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청허 휴정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조선불교의 이념을 제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참선 수행과 교학, 그리고 염불과 주력을 불교계의 수행과 포교의 덕목으로 삼은 것이다. 종지와 종통을 새롭게 정립한 것 역시 그의 수고였다. 이와 같은 청허의 조선불교 중흥 정신은 그 후학인 소요 태능과 편양 언기에게 이어졌다. 소요와 편양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선교학을 발전시켰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아울러 “소요 태능에게서 선종禪宗을 전수 받은 제자는 침굉 현변枕肱懸辯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제자는 해운 경열이며, 염향拈香하여 법을 이은 제자만도 30여 명이나 된다.”고 했으니 해운 경열 스님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청련 원철靑蓮圓徹 대사가 대둔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을 적에 소요 태능逍遙太能 또한 대둔사에 왔다. 해운 경열海運敬悅은 이 해에 태능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으며, 67세에 입적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청련 대사가 법회를 열었던 해는 곧 만력萬曆 36년 정미(선조 40, 1607)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경열은 만력 8년 경진(선조 13, 1580)에 태어나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서 3년째 되는 병술년(인조 24, 1646)에 입적했다.
그가 태능 대사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을 때는 소요 대사의 나이 46세 때였고, 경열이 입적한 해는 소요 대사의 나이 85세 때였다.
소요 대사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경열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가짐이 마치 ‘상대의 훌륭한 점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한다.’는 가르침과 같았으니 그의 소소한 기록은 비록 일실되고 없으나 그것이 어찌 슬픈 일이겠는가?


사실 소요 스님은 늘그막에 깨달음과 후학을 양성하는 덕을 성취하여 총림叢林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원근遠近에서 그를 숭모하여 귀의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스님들이 모여들어 그 숫자가 항상 수천을 헤아리니, 산문山門이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같았다. 그는 정법正法의 눈으로 자비와 지혜를 운용하여 곧장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가리키니, 실로 중생을 건네줄 뗏목이며 법문의 동량이었다.
제자 가운데 걸출한 인물은 해운 경열(海運敬悅, 1580~1646)이다. 옛일을 전해 들은 다산 정약용은 “이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가짐이 마치 ‘상대의 훌륭한 점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한다(見賢思齊)’는 가르침과 같았다.”고 했으니 사제의 인연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짐작이 간다. 다산 정약용은 “스님의 성씨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상고해 볼 만한 데가 없다.”고 하였다. 다산은 친하게 지냈던 아암 혜장 스님이 오래 전 문중의 기록에서 본 해운 스님의 기억을 더듬어 해운 경열 스님의 흔적을 그 편린이나마 정리하였다. 아암 혜장 스님 역시 당시 승정원 우승지 홍기섭洪起燮이 지은 「해운대사비海運大師碑」를 참고한 것이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스님은 28세에 소요 태능 스님에게 의발을 전해 받았고, 67세에 입적했다고 한다. 스승의 나이 85세였으니 스승보다 먼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소요 대사의 문도들이 수백여 명이나 되지만, 오직 경열만이 그의 종통宗通을 이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그의 호를 해운海運이라고 한 듯하다. 해운이란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간다는 의미이고,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는 유유히 소요逍遙함을 뜻하니 소요 대사의 전법傳法이 곧 해운이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소요 스님이 해운 스님에게 마음을 전하고 법을 전하면서 읊은 게송은 이러했다.


우뚝한 기봉機鋒은 흐르는 별이요 폭죽爆竹이며
높은 기상은 돌이 갈라지고 벼랑이 무너지는 듯하네.
사람을 대함에 죽이고 살림은 군왕의 칼 같고
늠름한 위풍威風은 오호五湖에 가득하네.


다산은 해운 스님의 호를 두고 스승 소요 태능 스님과 견주었다. 붕새가 남쪽으로 가 유유자적한다는 의미로 스승과 제자의 전법과 돈독한 관계를 설명하였다. 스승은 제자가 남쪽 바다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자 디딤돌이었다. 스승은 제자의 수행이 지닌 신묘함이 흐르는 별이자 폭죽에 비유했으며, 기상이 장대하여 그 위엄이 가득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불가佛家의 기록은 해운 스님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스승 소요 스님은 제자의 수행을 두고 “가슴속 법의 바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 없고(胷中法海幽難測)/시편詩篇의 현묘한 이치 너무 멀어 갚을 수 없네(篇內玄樞遠莫酬)”라고 하였으며, 제자가 닦은 선교학의 깊이에 대해 “중국의 달, 동이東夷의 바람 아무도 짝할 수 없네(華月夷風孰敢酬)”라고 하여 중국과 조선에 짝할 이가 없다고 찬탄하기까지 하였다.
󰡔동사열전󰡕은 “해운의 법을 이은 제자들은 취여 삼우醉如三愚이고 삼우의 법을 이은 제자는 화악 문신華岳文信이다. 문신의 법을 이은 제자는 설봉 회정雪峰懷淨이고 회정의 법을 이은 제자는 송파 각훤松坡覺暄이며, 각훤의 법을 이은 제자는 정암 즉원晶巖即圓이고 즉원의 법을 이은 제자는 연파 혜장蓮坡惠藏이다.”라고 하여 스님의 법맥을 전하고 있다. 곧 문인은 17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 취여醉如 스님이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취여 스님은 만덕사를 처음 일으킨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스님의 뒤를 이어 백련사를 중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요 스님의 문중을 번성시켰다. 해운 스님은 본래 담론을 잘하여 듣는 사람이 심취하였다고 한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는 조선시대 소요 태능 스님의 제자들이 대를 이어 법등法燈을 지키고 있었는데, 고려시대 백련결사白蓮結社의 법통을 이었던 8분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소요 태능 스님과 해운 경열 스님을 포함한 8분의 스님들이 법등을 지키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해운 스님을 덧붙여 찬탄한 것으로 보이는 명銘은 다음과 같다.


大翼南徙       붕새의 큰 날개 남쪽 바다 옮겨 갈 때
水擊三千       파도는 삼천리를 치고 난다
匪運昌遊       해운이 아니면 뉘라서 저리 놀까?
是後是傳       이 뒤로도 그의 법 전해지되
星飛竹爆       흐르는 별, 폭죽처럼 터져서
光燭長天       드넓은 하늘에 광명이 찬란하네
六燃其燈       진리의 등불 여섯 번 켜지더니
遂至晶蓮       마침내 정암과 연파에 이르렀네
苟求眞諦       진실로 진리를 찾고자 하면
視彼梓鐫       문집에 새긴 글을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