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대승 보살 운동의 핵심 경전 범망경
    불교관리학
    숲에서 배우는 불교
    텃밭불교
    불서
    자연과 시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생명은 서로 맞닿아 뒷받침한다

 


정성운
텃밭농부


거리의 풍경이 확 달라졌다. 플라타너스에서 떨어진 낙엽을 큰 자루에 담는 청소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도시 외곽의 퇴비장으로 옮겨진 낙엽은 삭혀져서 흙으로 돌아간다. 아파트 단지 입구의 조형물과 가로수엔 꼬마전구들이 감겨 있다. 이 거리를 해질녘에 지나가면 노란 불빛이 아롱거린다. 찬바람에 움츠린 어깨를 다독여줄 것이다. 이렇게 겨울이 오고 있다. 절기상으로도 입동을 지나 소설에 이르렀다. 멀리 설악산에는 벌써 눈이 내리더니 도시에도 첫눈이 내렸다. 폭설이다.
지금은 겨울의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기이다. 겨울은 인간은 물론 숨 쉬는 것들에겐 고난의 터널이다. 지구에서 적도 인근을 제외한 지역엔 계절이 순환한다. 겨울은 피해갈 수 없는 시간이다. 추위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다. 식물들은 생장과 생식이 멈추고 침잠한다. 씨앗으로 남거나, 낙엽을 떨구거나, 뿌리에만 숨을 붙여놓는 최소화의 방법으로 겨울을 난다. 겨울은 지구의 생명 순환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생명은 순환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춥고 어두운 겨울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란다. 나도 그렇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지라 겨울이 싫다.


동지에는 역시 팥죽


그래서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는 동지冬至가 반갑다.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서울을 기준으로 14시간 30분쯤이다. 이날이 지나면 밤보다 낮의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동지를 축제로 즐기는 풍속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제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야 일상적이지만, 동지를 기념하는 것이 특이하다. 동지 축제를 즐기는 것은 아마도 봄이 멀지 않아 올 것이니 움츠리지 말자며 자기를 다독이는 것 같은 것이리라. 사람에겐 때때로 이런 다독임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동지에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요즘에는 사찰에서 팥죽을 쑤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지 팥죽 나눔’이 연례행사로 퍼지고 있다. 여러 음식 중에 굳이 팥죽을 먹는 것은 나쁜 잡귀를 쫓아내는 주술적 의미가 있다. 또 동지로 날을 잡은 것은 긴 겨울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안도와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지 팥죽은 겨울을 이겨내는 빛나는 지혜이다. 사찰에서는 이날 내년도 달력을 나누어준다. 새날을 안겨주는 것이다. 여기에 팥죽 나눔까지 더해지니, 이를 일러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밭은 조용하다. 미처 캐내지 못한 고추와 가지 줄기가 스산함을 더해준다. 지난주엔 쥐눈이콩을 털었다. 5kg 정도를 얻었다. 내년 한 해 동안 나의 밥상에 오를 것이다. 배추 농사는 흉작이다. 20포기를 심어 김장하려 했는데, 겨우 3포기만 살아남았다. 그나마 결구가 되지 않아 국거리에나 쓸 수밖에 없다.
농사는 자연을 바탕으로 하되 인위人爲가 보태지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의 일, 그러니까 밭을 다듬어 씨앗을 뿌리고, 병충해를 제어하고, 김을 매고 물과 거름과 영양분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많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자연이 하는 일이 팔구 할이라면 나머지는 농부의 일이다. 자연은 비를 내려주어 촉촉함을 유지케 해주고, 햇볕을 주어 광합성을 하게하고, 적당한 따뜻함을 주어 작물의 생명을 부추겨주고, 흙은 뿌리를 받아주고 온갖 영양분을 작물에게 공급한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농사를 이어갈 수 없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농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농부는 농사에서 자연이 하는 일을 99%라고 하는데, 이런 얘기도 일리가 있다. 아무튼 농사는 인위에 속하지만 자연에 전적으로 기대는 일임에 틀림없다. 과학기술이 발전해 유사 자연에 이를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발전한들 자연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때 사람의 유전자 정보를 해독하는 과학의 성과가 눈부셨다. 그래서 일단의 과학자들은 DNA로 인체의 작동원리를 파악할 수 있고, 유전자의 조합과 개조를 통해 난치와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기획을 했다. 생물학이 세상을 바꾸는 중심이 될 것이라는 사회생물학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대표적인 이가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이었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는 여전히 신비의 영역이다. 사회생물학은 과학은 언제나 과정이라는 명제를 놓쳤다. 결정론을 펼치는 것은 과학이 늘 경계하는 태도이다. 과학의 새로운 발견은 또 다른 발견에 이르는 디딤돌 같은 것인데, 정상에 이르렀다는 선언은 오만 또는 욕심의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생명은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복잡다단하고 정교하고 미세한 흐름의 총체이다. 생물학으로 생명을 모두 알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일부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불교에서 생명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어느 경전에서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 후 14일 후에 배아가 형성되며’ 등의 가르침이 있다. 정작 불교는 생명을 관계의 조화로움으로 본다. 즉, 생명은 연기적 관계의 무수한 과정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보는 생명관이다. 유교에서도 사람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을 말한다. 천·지·인 3자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통합적 생명의 관점 홀로비온트, 통생명체


최근 자연과학계는 ‘홀로비온트 생물학’에 주목하고 있다. 홀로(holo)는 전체, 비온트(biont)는 생물체 단위를 뜻하는데, 둘을 합친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생명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의 세스 보든스타인 교수를 비롯해 여러 나라 과학자 21명은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은 논문에서 숙주와 공생미생물을 하나의 생물체 단위로 파악하자는 새로운 생물학으로서, 이른바 ‘홀로비온트 생물학’을 제안했다. [오철우, ‘통생명체 생물학’으로 보는 삶, 한겨레 미래&과학, 2024.11.19.]     
오철우 한밭대 강사(과학기술학)는 이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새로운 관점의 생물학을 제안한 보든스타인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인간 세포보다 더 많은 인체 미생물은 인체의 생물학적 특성 변화를 DNA보다 더 많이 설명할 수 있다.” DNA 결정론을 날려버리는 언급이다. 오씨는 “이미 많은 연구는 동식물이 미생물 없이 저 혼자 순수한 개체로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면서 “우리는 홀로비온트이며 지구생태계에서 살아 있음은 독주가 아니라 무수한 것들의 합주이다”라고 의미를 짚었다.
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주 공간에 지구생태계를 그대로 복제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얽힘,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네트워크까지 그대로 복제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라면서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생명체는 낯선 용어이지만, 이런 개념은 낯설지 않다. 물리학자 장회익은 생명을 ‘온생명’이라 불렀다. 생명은 각개이면서(낱생명) 서로를 뒷받침하는(보생명) 관계 속에서 유지되며, 이를 온생명이라 한 것이다.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세포 내 공생관계’를 입증했다. 불자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이다. 불교의 연기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연의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체계가 아니다. 연기론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상의상존하는 가운데 유지한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이다. 불교는 자연과학에 길을 안내해주고, 과학은 불교의 내용을 잘 설명해준다.
가을걷이를 한 겨울 초입의 밭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보았다. 마음만은 따뜻한 겨울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