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돈
한의학 박사 | 전 원광대학교 한의대 외래교수 | 햇살고운 한의원 대표원장
신라시대 경문왕은 당나귀와 비슷한 귀를 갖고 있었다.
왕의 의관을 만드는 복두장은 홀로 아는 비밀을 평생 말하지 않다가 결국 화병이 되었다. 죽을 무렵 절에 있는 대나무 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질렀다. 그 후 바람이 불 때면 대나무는 소리 내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울어 순식간에 그 소문이 도성에 퍼져 나갔다. 임금은 이것을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그곳에 산수유를 심었는데 그 후 바람이 불면 “임금님 귀는 길다”고 하는 소리로 변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왕 미다스는 신의 미움을 받아 어느 날 귀가 당나귀 귀처럼 변했다. 미다스는 자신의 귀를 모자로 가리고 다녔으나 이발사에게만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비밀을 지키라고 명령받은 이발사는 발설을 참을 수 없어서 땅에 구멍을 파서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구멍을 다시 덮었다. 그 뒤 그 자리에 생긴 갈대밭에서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필자는 빈곤한 지역에 의료봉사활동을 자주 갔었다.
거기서 의료활동을 하다 보면 울화병을 고치고 싶어하는 시골아주머니들을 흔히 만나게 된다. 알다시피 울화병은 봉사활동 같은 짧은 시간에 쉽게 치료되는 병이 아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소통하는 것뿐이다. 진찰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은 자기 이야기보따리를 끝없이 풀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한탄하고 울며불며 누군가에게 원망하는 한풀이를 한다. 가슴 속에 꾸깃꾸깃 쌓아놓았던 응어리를 한바탕 입으로 풀고 귀가할 때쯤 가슴이 후련하다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던 필자에게 고마워하곤 했다.
임금님 귀와 울화병 이야기에서 인간은 가슴에 뭔가를 쌓아놓으면 병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비밀을 품고 있기 어려운 존재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하지만 때로는 비밀을 간직해야 할 상황이 생기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입을 다물고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울화병의 한자 뜻풀이를 해보자.
빽빽할 울鬱, 불 화火, 질병 병病, 즉 화가 빼곡하게 들어차 병이 난 것이 울화병이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한참 끓이면 압력이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 몸에도 화가 쌓이면 압력이 높아진다. 화병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한숨을 내쉬는 것은 가슴의 압력을 낮추려는 치료본능이다. 속에 화가 찬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며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충혈 된다. 화가 머리 쪽으로 올라가서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럽거나 뒷목이 뻣뻣해지기도 하고 귀에서 소리가 들리거나 콧속이 마르기도 한다. 없던 고혈압이 생기기도 하고 눈이 건조해서 뻑뻑해지기도 한다. 모두 화가 쌓여서 생긴 증상이다.
가슴에 쌓여있는 화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뚜껑을 열거나 불을 줄여서 주전자 속 압력을 낮추는 것처럼 임금의 복두장이나 이발사 그리고 시골아주머니, 이들은 가슴 속에 눌려있는 “화”라는 압력을 낮추기 위해서 속에 있는 비밀을 발설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입을 통하여 밖으로 토해내야만 누르던 압력이 낮아져 막혔던 가슴이 뚫리기 때문이다.
화병은 이미 수 천 년 전부터 한의학에서 치료해 오던 분야이고 가슴에 들어찬 뜨거운 화기를 풀어주는 한약재 또한 다양하다. 그 중 대나무 잎, 대나무 속, 갈대 잎, 갈대 뿌리는 열을 내리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낫게 하며 가래를 삭이고 갈증이 나는 데 많이 쓴다. 내열로 인하여 숨이 차고 입병, 후두염 등이 생길 때도 사용한다. 공교롭게도 복두장과 이발사가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달려간 곳이 대나무 숲과 갈대밭이라니 이 또한 화병을 치료하려는 본능에서 거기로 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