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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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삼매로 반야지혜 증득하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금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그런데도 사시절서의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 며칠 뒤면 입동이니, 소설, 대설, 동지를 지나면 일년도 그렇게 가게 됩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만일 선정삼매禪定三昧를 닦으면, 반야般若지혜智慧의 바른 소견所見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중생은 탐·진·치貪嗔癡 삼독심三毒心과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오욕락五欲樂에 물들어 번뇌망상에 덮여 있습니다.
범부 중생의 그런 마음을 제어하려면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 육바라밀六波羅蜜, 성문소승聲聞小乘·연각중승緣覺中乘·보살대승菩薩大乘의 가르침인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과 같은 수행의 덕목을 닦아가야 합니다.
선정삼매를 닦을 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드러나고 바른 지혜와 바른 소견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정삼매를 닦으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이 생멸하는 모습도 잘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오온이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움직이면 오취온五取蘊이 됩니다. 그러니 선정을 닦지 않고는 세간의 일도 알기 어렵고, 출세간의 일은 더더욱 알기 어렵습니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우리는 세간의 이치조차 온전히 깨닫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출가 수행자가 닦는 선정삼매와 반야지혜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법, 선정삼매와 반야지혜를 구족하게 되면 크게 이익을 얻는다고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지 약 20년쯤 되었을 때, 그러니까 55세쯤 되셨을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나를 좌우에서 보좌보필하면서도 그러고도 이익을 잃지 않겠느냐?”
그 말을 들은 상수제자들은 자신들이 부처님을 모시겠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시자가 필요한 나이에 어찌 나를 보필하겠다 하는가.” 하시며 정중히 사양하십니다. 그 모습을 본 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불존자舍利弗尊者가 선정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마음을 관해보니, 부처님께서는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곁에서 보필해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난에게 그 뜻을 전하니 아난존자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는데, 첫째, 부처님과 혈육이기 때문에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둘째, 부처님은 왕족이나 장자들의 공양 청을 자주 받는데, 시자인 자신이 따라가 맛있는 공양을 얻어먹으려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일까 우려된다는 점. 셋째, 승가의 전통대로는 떨어진 헌 천을 모아 가사를 지어서 입어야 하는데 부처님께는 좋은 새 천으로 가사를 지어 올리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을 얻어 입으려고 곁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까 걱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세간에서도 권력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곁에 있으면 오해와 말이 따르기 마련이듯, 아난존자 역시 그런 오해를 우려했던 것입니다. 아난존자는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출가 후 10년 만에 고향인 가비라국에 오셔서 설법하셨는데, 아난존자는 그 이전 4년 동안 다른 곳에서 하신 법문을 자신에게 다시 들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아난존자는 언제든지 부처님 처소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청했는데, 이 또한 허락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난존자는 약 25년 동안 부처님 곁을 시봉했고,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을 때, 아난을 칭찬하며 한 번도 때 아닌 때 부처님 처소에 출입하지 안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가지 법을 구족하면 크게 이익하리니, 하나는 선정삼매요, 다른 하나는 반야지혜니라. 왕골을 베어 새끼줄을 꼬던 옛 방식처럼 서둘러 잡아당기면 줄이 끊어지듯이, 보살이 두 가지 법을 닦는 것도 그러하다. 굳게 박힌 나무를 뽑을 때에도 먼저 흔들어 주어야 잘 빠지듯, 선정삼매로 깊이 박힌 번뇌 망상을 흔들어 놓고, 반야지혜로 살펴야한다.”는 것입니다. 고요한 힘으로 번뇌를 흔들어 놓고, 지혜로 분명히 살펴 뽑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번뇌는 탐진치, 망상은 재색식명수 오욕락입니다.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러합니다. 무상無常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모든 것은 온전하지 않다는 말이며, 모두 인연 연기해서 잠시 나타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큰 괴로움과 고뇌는 결국 무상함을 모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자기 생각에만 매달려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니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무상함을 깊이 깨달아야 하고, 네 가지 올바른 선행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아무리 가르침을 많이 들어도 싫증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고, 그 소리 또 하네.”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얼마나 방대합니까. 나 역시 공부를 하다 마음에 와 닿는 가르침은 외워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을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는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사유해야 하고, 셋째는 그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해야 하며, 넷째는 깨달음으로 회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개시오입開示悟入, 열어 보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길을 위해 45년 동안 법을 설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잊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교에서도 공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불교에도 문·사·수聞思修 수행법이 있습니다. 듣고(聞), 생각하고(思), 닦아야(修) 삼매에 든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으로 성취하는 지혜, 생각함으로 성취하는 지혜, 수행함으로 성취하는 지혜, 이러한 단계를 거쳐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에 매여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라고 하지만, 사실 어제와 내일은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그래서 『아함경阿含經』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흘러간 과거를 뒤쫓지 말라. 오지도 않은 미래를 목말라 하지 말라. 이미 흘러간 것은 이미 지난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일을 있는 그대로, 흔들림 없이 보아라.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하라. 누가 내일 죽는 것을 알려주겠는가?” 아무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끔 말씀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일어나 부지런히 살아가고, 저녁에 누울 때는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겠지 하며 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면 이미 유언도 다 해놓은 셈 아니겠습니까?
어떤 이는 근검절약하고 검소하게 살면서도 애써 모은 것을 정작 쓰는 사람은 딴 사람일 때도 있고, 혹은 어디에 뭘 두었는지도 모를 만큼 쌓아 두기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지혜로운 근검절약이 아니라 인색함일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인색한 사람, 옹색한 사람은 “마른 완두콩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보다 변화시키기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색하게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근검절약은 지혜로운 이의 삶이지만, 옹색하고 인색한 사람은 어리석은 욕심과 과욕이 만든 것입니다. 누가 내일 죽음을 알겠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생각은 단순한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제 장점이 하나가 있다면,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일들을 짊어지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좋고, 행동은 분명한 것이 좋으며, 인자하고 선근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허망한 마음이 아닙니다. 선근善根, 착한 마음, 건강한 몸을 갖추고 산다면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래 착한 심성과 선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를 닦아 자비의 보리심을 증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연민심도 생기고, 다른 이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자비심도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달라이 라마 스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함이다.”
우리가 겸손함과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도움을 받아야 할 때 오히려 이런저런 조건을 내걸고 자기 방식대로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동의해 주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복福은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은 스스로 지어가는 것입니다.
복이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복이 없으면 상대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감언에 속는 것입니다.
복은 내면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바른 마음을 내게 하고, 자기 도리와 근본을 잊지 않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이러한 실천을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합니다.
바라밀다는 우리를 정화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제불보살님, 그리고 선지식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 나를 구원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용기와 겸손함입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겸손한 모습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 무게를 감당 하지 못 해서 휘어지는 벼이삭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 수행 정진의 힘은 게으르지 않음, 불방일不放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 스님의 기도문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저희의 모든 죄업과 무명업장,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낼 수 있도록 지혜를 주소서.” 번뇌와 망상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선정삼매로 흔들고, 반야지혜로 뽑아내야 다시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왕골의 새끼줄처럼 손을 조화롭게 비벼야 줄이 만들어지듯이 선정삼매에 매이지도 말고, 번뇌 망상에도 치우치지도 말며, 선정과 반야를 조화롭게 닦으며 살아가는 불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 품 안에서 따뜻한 가정의 공동체가 둘이 아님을 늘 자각하며 살아가는 불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