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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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처음으로 풀어낸 번역본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처음으로 풀어낸 번역본


박경희
중도기획 디자인실장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
조병활 역주
상권460쪽, 하권388쪽
152×225 | 양장제본
값 각 권 27,000원
어의운하 펴냄



도서출판 어의운하에서 신라 후기 유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857-?)이 남긴 네 편의 비문을 모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근세의 대강백 석전 정호(石顛鼎鎬, 1870-1948) 스님이 한문으로 상세히 주석한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을 조병활(불전연구원 원장) 박사가 완역하여 출간했다.
이번 번역본은 기존의 난해한 주석과 전고典故를 현대 한국어로 충실하게 풀어낸 최초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최치원은 885년부터 893년 사이에 네 곳의 산에 위치한 사찰과 고승의 행장을 기록한 네 편의 비문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지리산 쌍계사 진감 선사 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塔碑銘(진감 비명)」, 「초월산 대숭복사 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숭복사 비명)」, 「숭암산 성주사 낭혜 화상 비명崇巖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낭혜 비명)」, 「희양산 봉암사 지증 대사 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지증 비명)」 등으로, 네 개의 산 이름을 따 ‘사산비명’이라 부른다.
사산비명은 신라 말기 선종의 전파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신라인들의 종교관·정치 상황·사찰의 연혁 등이 촘촘히 기록되어 있어 고대 불교사·사상사·한문학사·신라사 연구의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만큼 문장이 난해하고 전고가 방대해 쉽게 읽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석전 정호 스님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기존 주석서를 종합·비판하여 새로운 한문 주석본 『정주사산비명』을 완성했다. 이번 번역서는 바로 이 석전본을 우리말로 풀어낸 것이다.
네 편 비문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감 비명
2,500여 자로 구성된 「진감 비명」은 신라 선종 정착에 기여한 진감 스님(眞鑑, 774-850)의 생애를 집약한 글이다. 효심 깊은 소년에서 출발해 당나라에서 득도하고, 도의 스님을 만나 선의 핵심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귀국 후 화개 화엄구곡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는 기개와 높은 수행력을 보여준다. 입적 후에는 ‘대공령’이라는 탑호가 내려졌고, 그의 수행정신은 이후 신라 선풍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숭복사 비명
「숭복사 비명」은 ‘곡사鵠寺’가 어떻게 지금의 대숭복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사찰의 중창 과정이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상세히 기록한다.
원성왕릉의 조영, 경문왕·헌강왕 대의 중수 과정, 그리고 최치원이 비문을 짓던 시기에 잇따른 왕의 서거 등 신라 왕실의 격동기까지 함께 담겨 있어 사찰사寺刹史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다.


낭혜 비명
5,100여 자의 장편으로 구성된 「낭혜 비명」은 ‘해동 신동’이라 불리던 낭혜 스님(朗慧, 800-888)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능가선과 화엄을 두루 익힌 뒤 당나라에서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깊은 깨달음을 얻고, 귀국 후 성주사에서 동서 사방의 학승들이 운집하는 선풍을 일으킨 기록은 당시 신라 불교의 국제성과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특히 낭혜 스님의 겸손한 인품과 제자들의 번성은 신라 말기 선종의 위상을 실감하게 한다.


지증 비명
「지증 비명」은 도헌道憲 법호로 불린 지증 스님(智證, 824-882)의 ‘여섯 가지 남다름(六異)’과 ‘여섯 가지 올바른 행실(六是)’을 통해 한 수행자의 내적 성취와 덕행을 조명한다.
또한 본문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불교 수용 과정과 남종선의 유입까지 포함되어 있어 한국 고대 불교사 요약본 역할도 한다.


석전본 『정주사산비명』의 특징 중 하나는 사산비명의 난해한 문장과 전고를 풀기 위해 불가류·유가류·도가류·역사서·제자백가 등 폭넓은 문헌을 동원해 주석을 달았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해설을 넘어 신라 말기 사상지형과 동아시아 지식체계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 속에서 사산비명을 재해석한 탁월한 성취다.
또한 기존의 주석서들을 비판적으로 대조하여 옛 해석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사산비명 연구의 기준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학술사적 가치도 크다.
본 번역서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석전본을 원전으로 삼아 충실하게 옮긴 것으로, 본문과 직접 관련 없는 주변 기록들은 제외해 독자의 집중도를 높였다.
또한 「지증 비명」의 경우 기존 번역본을 전면 수정·보완해 보다 정확한 번역을 제시했다.
사산비명은 그 자체로 신라 후기 불교의 정수이자, 한문학의 걸작이며, 고승들의 사상이 압축된 정신문화의 보고이다.
이번 『정주사산비명』 번역본은 그 숲과 나무를 처음으로 온전히 보여주는 귀중한 길잡이로, 불교 연구자뿐 아니라 불교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도 뜻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