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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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眼目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입동立冬이 지나니 소설小雪이 오고 대설大雪이 지나면 동지冬至입니다.
사시절서四時節序 운행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고해苦海바다라 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며,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지無智해서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한 것을 모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세상일은 무상합니다.
『금강경金剛經』에 “여래如來는 시진어자是眞語者며, 실어자實語者며, 여어자如語者며, 불광어자不狂語者며, 불이어자不異語者”라 하셨습니다.
진실한 말, 실다운 말, 정직한 말, 거짓되지 않은 말, 다르지 아니한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이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안목으로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만약 일체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먼저 부처님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진실한 가르침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하며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만약 형상으로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구하고자 하면 이러한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이라, 여래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眞實을 들여다보면, 정직함과 성실함의 융합체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진실해야 된다고들 하는데, 사회 현상을 보면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고 있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 하였습니다. 어떠한 일에도 얽매이지 말고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은 하인처럼 일을 하며 살아도 주인이고, 머슴은 아무리 주인행세를 해도 역시 하인입니다. 그러니 어떤 인생이 올곧게 살아가는 생활이 될까요?
선행善行과 자비慈悲와 포용包容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고, 연민심憐愍心으로 살아가야 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을 사는 것이 현대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의 리더(leader)로 사는 길입니다. 이타행利他行과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는 이가 리더인 것입니다.
한 마디 단어를 쓰는데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말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경계하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이면 말끝마다 “정말, 정말”이라 할까요. 꼭 그렇게 미사용어로 수식할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 언어가 타락되어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에 노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의심이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대개는 의심하지 아니함을 의심이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나 너 의심 안 해.” 한다면 대개는 의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자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재료보다 조미료가 더 많으면 음식이 더 맛이 있을까요? 일정 부분 음식에 양념은 필요하지만, 너무 많이 쓰다보면 오히려 음식 맛을 그르칠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말이 되고 행동이 됩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 역시 결국 그것은 말이 되고 행동이 됩니다. 이것이 삶의 핵심이고, 부정적인 생각은 참된 성품을 잃어버리게 하는 슬픈 현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중국의 위 지안(于娟)은 31살에 세상을 떠나기 전, 페이스북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떠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도 했던 여성인데,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으면서도 올린 글들이 페이스북에서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고 공감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 중 「나는 너에게 희망의 싹이 되고 싶다」는 글이 제 가슴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과도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준다는 생각, 줬다는 생각, 받을 것이라는 생각 없이 주는 것입니다.
씨앗은 건강해야 합니다. 토양도 좋아야 하고 거름도 있어야 합니다. 햇빛에 물도 주고 농부의 수고로움도 필요합니다. 이 모두가 공동체의 구성원입니다.
『화엄경華嚴經』 「십행품十行品」에 “중생들은 내 복밭이고 선지식이다. 찾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몸소 와서 나를 바른 법에 들게 하는구나. 나는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어기지 않으리라.”
불자들은 복 밭이고 저의 선지식입니다. 몸소 찾아와서 바른 법에 들게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바에 대한 것을 어기지 않으리라 항상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원합니다.
“내 보시를 받은 불자들은 모두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 평등한 지혜를 가지며 바른 법을 갖추어서 널리 선행善行을 하다가 마침내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에 들어 지이다.” 하는 것입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에도 “유죄즉참회有罪卽懺悔하고 발업즉참괴發業卽.愧하면 유장부기상有丈夫氣象이며 우개과자신又改過自新이면 죄수심멸罪隨心滅이라.”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으며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면, 그 죄업도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힘과 용기와 지혜를 드리워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이것이 불자의 기상이 아니겠습니까.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면 잘못도 이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부처성품 말고는 자성은 없습니다. 인연에 의해서 연기되어지는 허상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참회라는 것은 지은 허물을 뉘우쳐서 다시는 그 일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큰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큰 연유는, 모르고 짓는 죄는 참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노출되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것을 가슴에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면,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죄가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수경千手經』에도 나오는 법문처럼 죄업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허상의 그림자이며 아지랑이 같은 것일 뿐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허물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마음이란 본래 비어있어서 고요 적적함으로 죄업이 깃들 곳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간곳이 없고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제7 말라식末那識과 같은 곳으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인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탐애貪愛 진애瞋碍 치암癡暗과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이 봇물 터져 들어와서 십악업이 되어 온통 구정물로 가득 만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입각지立脚地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훗날 후회할 뿐입니다. 다만 믿음이 있고 확신이 있는 것은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날 때에는 현재의 모습보다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삶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다른 종교는 전생이 없습니다. 천당과 지옥만 있을 뿐, 내생도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어제와 오늘과 내일처럼, 전생, 금생, 내생으로 이어지는 종교는 불교뿐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서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모르고 짓는 죄업이 더 큰 것은 참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하며 탁마하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