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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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삶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뉴욕 원각사 대웅전大雄殿에 3여래 부처님과 4보살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점안 법회에 수백 명의 불자들이 다녀갔습니다.
뉴욕에 인연因緣을 맺게 된 연원은, 미주 한국불교에 헌신해 오셨던 뉴욕 원각사 조실 법안 스님이 열반하시기 2년 전, 한국에 오셔서 총무원장 법장스님과 동국대학교 재단 이사장 녹원스님께 원각사를 간곡히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단이나 학교에는 마땅한 소임자 스님을 찾을 수가 없고, 구룡사의 정우 스님이 어떻겠느냐고 추천을 하셨다고 합니다. 스님은 구룡사와 여래사에 휠체어를 타고 오셔서 도량을 둘러보고 부처님을 참배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셔서 전화를 주셨어요.
“꼭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내가 다시 갈 수 없으니 스님이 미국에 올 수 없겠느냐.”
그래서 2004년 8월 15일 뉴욕 원각사에 가서 스님을 뵈었는데, 스님과 차 한 잔 나누는 짧은 시간에 스님의 애잔한 눈빛과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적은 힘이나마 원각사에 함께 하겠습니다.”
법안 스님은 그 자리에서 원각사의 주지와 종교법인 원각사 이사장 자리를 내어 주셨습니다. 어느덧 열여덟 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원각사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산림이었습니다. 법안스님 사시는 요사채 외에는 기름을 넣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며 많은 불자들이 불사에 동참한 가운데 야단법석野壇法席의 오늘 점안 식 법회는 환희법열歡喜法悅 그 자체이었습니다.
 
불현 듯 월하 노스님께서 생전에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정우는 절만 짓다 죽을 란가?~~~”
삼십여 년 전, 구룡사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시기에 일산 신도시 정발산에 종교 용지를 분양받고 여래사를 짓겠다고 조감도를 들고 통도사에 내려갔었습니다. 그 조감도를 노스님께서는 여래사를 다 지을 때까지 방장실에 걸어 두고 오는 이들에게 보여주신 칭찬이었습니다.
노스님께서 저에게 포교당 불사를 할 수 있다는 무언無言의 칭찬이셨습니다.
그런 불사를 원각사에서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대웅보전과 무량수전, 선방인 설산당과 보 림원은 훗날 한국불교의 우담발라로 피어날 것입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쩌면 일에 취한 듯 보일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불사를 하는 중에 조급증을 내거나 서두른 일은 없습니다. 물 흐르듯이 순차적으로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불사를 하고자 합니다.’ 하는 말을 법당에서는 하였지만, 누구에게도 불사를 강요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룡사와 여래사는 물론 뉴욕 원각사, 인도 부다가야 고려사, 북인도 히말라야의 설산사 등 그 많은 불사를 해 오면서도, 현재에도 진행하고 있는 구룡사 별관인 전법회관 건립불사 또한 기쁜 마음으로 십년 넘게 준비하여 짓고 있을 뿐 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을 옮기는 불사의 참모습에 많은 분들은 찬탄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불사를 불자들은 다 같이 해오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늘 기쁘고 즐거운 환희법열의 일상적인 불사이었습니다.


제가 30대 중반에 구룡사에 오게 된 인연도 어른 스님께서 느끼신 게 있으셔서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정우를 어떤 일꾼으로 쓰면 될지 생각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37년을 구룡사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85년 10월에 가회동 구룡사를 허허벌판이던 구룡산 자락 양재동에 2천만 원 전셋집을 얻어서 마당에 20평짜리 천막법당을 설치하고, 바닥에는 비닐장판이었습니다. 40여년의 인연을 맺고 있는 스님이 수인 스님입니다. 수인 스님은 통도사 선방에서 정진하였는데, 해제하는 날 월하 노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노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서울의 정우는 어찌 살고 있는지 몰라.~~~” 그 자탄의 말씀을 듣고 수인 스님은 본사인 백양사로 가지 않고 걸망을 짊어지고 구룡사로 와서 천막법당에서 천일기도를 시작했어요. 지금의 구룡사 건물을 짓는 중에 1층 회관에 또 스티로폼 깔고 비닐장판 깔고 벽면은 합판으로 대고 임시 법당으로 사용하며 기도와 법회를 하였습니다.
천일기도를 회향하던 날 스님께 기념패를 드리게 되었는데, 울컥 한 마음에 기념패에 적힌 글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럴 때 보면 저도 감성적입니다.
그렇게 울컥 한 마음에 말 한마디 못 한 적이 또 한 번 있습니다. 종단에서 포교대상 종정 상을 주실 때 그곳에 동참한 대중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연단에서 종정 상만 받고 말없이 내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이 불사는 즐겁고 기쁩니다. 그 일은 그 자체로도 즐거울 뿐 아니라 그것이 쌓이어 우리 존재를 완성하게 하는 기쁨의 근원이요, 즐거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찰에서는 환희법열이라 하기도 합니다.
환희는 내면의 기쁨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법열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입니다. 이 환희법열은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불사삼매佛事三昧에 들어 지금 까지 잘 살아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일이 싫어지는 경우, 귀찮아지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일이 싫어지면 잘못하거나 안 하려고 합니다. 못하고 안 하면 그 일은 곧 잊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고 있는 그 일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려 노력합니다. 삼매에 들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겠지만, 하는 일들이 늘 즐거우면 일을 잘하게 되고, 잘 회향하게 되면 더 큰 일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타고난 사람의 노력이나 그 일을 즐기는 사람에게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번뇌에 찌든 이들이 어둠 같은 무지몽매함만 끊으면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해탈의 경지가 될 것입니다.
세상살이에서 해탈했다는 말은 참 자유를 얻었다는 수행자의 모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거사님’ ‘보살님’이라 부르며 공식적으로는 ‘성불하세요.’ 라고 하지만, 불자들을 대하는 진심眞心은 항상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입니다.
제가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저에게 얼마나 감사한 분들이고 고마운 분들이십니까. 거기에 연꽃을 피우듯 만개한 꽃향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시니 더욱 그런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번뇌를 끊으면 해탈이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했습니다. 또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도 “단번뇌명이승斷煩惱名二乘이요, 번뇌불생명열반煩惱不生名涅槃이라, 번뇌를 끊으면 해탈이요, 번뇌가 일어나지 아니함을 열반”이라 했습니다.
씨앗과 열매가 같은 종성에서는 둘이 아닌 이치처럼 열반은 해탈입니다.
열반은 고요함입니다. 열반은 나를 내세우지 아니함이요. 열반은 법열입니다. 환희는 해탈이고 법열은 열반입니다. 열반은 욕심을 여읜 자리입니다.
열반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주어도 준다는 생각 없이, 주었다는 생각 없이, 받을 것 없이 주는 것을 참 보시라 하듯, 사랑도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열반은 탐욕을 여읜 것입니다. 열반은 생사를 여읜 것입니다. 열반은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니 내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열반은 공空함을 여읜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색色과 공空을 말할 때, 색은 물질이고 공은 있는 그대로라 한 말을 잘 못 알아듣고 판단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반은 공함조차도 여읜 자리입니다. 그대로가 열반이고 해탈입니다.


방일放逸하지 않기 위해서 선정삼매禪定三昧를 닦고, 큰 지혜를 장엄하기 위해서 선정삼매를 닦고, 자제함을 얻기 위해서 선정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생사의 나쁜 과오를 관찰할 수 있으려면 반야지혜般若智慧를 닦아야 합니다. 반야지혜가 없으면 나고 죽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으면 또 다시 태어나는 나고 죽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면서도 지장보살이 있는 곳에 가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겠다는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런 광대무변한 원력이 없어서 지옥에는 안 가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은 다시 태어날 일이 없는 세상에 상주불멸한 본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고 미추가 없고 대소가 없고 장단이 없고 전후가 없고 좌우가 없는 온전한 세상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반쪽이니까 반쪽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선근善根과 보리심菩提心을 증장하기 위해서, 모든 번뇌를 깨뜨리기 위해 그와 같은 삶을 비추어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착각과 혼란을 일으켜 마음을 괴롭히는 감정선입니다. 감정적 경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행할 때 방편과 보리심으로, 그래서 방편과 지혜를 두 수레바퀴의 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방편은 보리심을 증장시키고, 통찰력은 지혜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절대 고달픈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삶을 사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