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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불교의 청사진(16)

성운星雲 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지난호에 이어서>


13. 생명관生命觀 : 생사지도生死之道


인간은 겨우 수십 년의 짧은 생명을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나고 죽는 생사의 문제이다. 생사는 그림자와 같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삶과 죽음은 끝없이 거듭된다. 태어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죽으면 또 어디로 가는가? 보통 사람들은 이 문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불교의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에 비추어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유정 중생은 ‘무명無名’ 번뇌가 쌓여 각종 ‘행(行: 행위)’을 짓기 때문에 그 업으로 ‘식識’이 생겨난다. 팔식八識의 하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모체의 자궁 안에서 점차 자라나 생명체가 된다. 이것을 일러 ‘명색名色’이라 한다. ‘명’은 생명체의 정신 부분을, ‘색’은 물질 부분을 가리킨다. 수개월 뒤 생명체의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육근이 성숙되는데, 이것을 일러 ‘육입六入’이라고 한다. 태아는 모체를 떠난 뒤 점차 외경에 대해 ‘촉(觸: 접촉)’하기 시작한다. 외부 세계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수(受: 받아들임)’하여 ‘애(愛: 사랑)’와 그렇지 않음이 생겨난다.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한 ‘취取’에 집착하는 행동을 보이면 결국 신구의身口意로 업을 짓고, 다시 ‘유有’라는 생명체를 심게 된다. ‘생(生: 태어남)’이 있으면 ‘노사(老死: 늙음과 죽음)’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생명이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생명은 시작도 끝도 없는 생사의 윤회에서 끊임없이 돌고 돈다’고 말한다.
불교를 믿는다고 생사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생사를 초월하라는 것이다. 생사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설령 부처님이라도 “인연이 있어 부처님 세상에 나셨고, 인연이 다해 부처님 입멸하셨네. 오는 것도 중생을 위해 온 것이고, 가는 것도 중생을 위해 가시네!”처럼 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죽음을 네 종류로 나눈다. 수명을 다한 죽음, 복을 다 누린 죽음, 의연한 죽음이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연기처럼 날아가 사라지거나 지각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것도 아니다. 연기처럼 날아가 사라지거나 지각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것도 아니다. 이 문을 나가 또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환경에서 바뀌는 것이다. 사망이라는 통로를 지나가면 사람은 더 밝게 빛나는 정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경에서는 죽음의 관념을 더욱 현실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① 지옥을 벗어남: 『대지도론』에서는 “고난과 재앙은 지옥과 같다”고 설하셨다. 즉 온갖 괴로움이 모인 신체를 지옥이라 여겼다. 지옥에서 석방되어 더 이상 어떠한 속박도 없이 자유로운 것을 죽음이라 보았다.
② 다시 태어남: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의 “참깨에서 참기름이 나오고,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는 내용처럼, 죽음은 끝맺음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③ 학업을 마침: 『반니원경般泥洹經』에는 “바르게 서로 가르쳐서 모든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배움이 성취되기를 기다린다”는 법문이 있다. 살았을 때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요, 죽음은 학업을 마치는 것과 같다. 살았을 때 지은 업의 성적에 따라 자신의 졸업장과 성적표를 받아 윤회를 하고 새로운 세상을 대면하게 된다.
④ 이사를 감: 무릇 태어난 것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이란 그저 낡고 썩은 몸뚱이라는 집에서 나와 크고 넓은 마음이라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출요경出曜經』은 “사슴은 들판으로 돌아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돌아가며, 이치는 분별로 돌아가고 진인眞人은 적멸로 돌아간다”고 설하고 있다.
⑤ 옷을 갈아입음: 죽음은 낡고 허름한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 『능엄경』은 “허공이 그대 마음속에서 생겨나지만 그것은 넓고 맑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일 뿐이니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 풍진 세상에서 겪는 온갖 경험도 한낱 뜬구름이며 스치듯 지나가버리니 그저 옷 한 벌에 불과하다.
⑥ 신진대사: 인간의 신체조직은 매일 신진대사를 필요로 한다. 오래된 세포가 죽어 없어져야 새 세포가 자라날 수 있음을 『증일아함경』의 “묵은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생겨나면서 변화하고 바뀌며 멈추지 않고 풀리지도 않는다”는 내용처럼, 삶과 죽음도 세포가 신진대사를 하듯 옛것이 사라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생명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진다.


이 밖에도 불교에서는 죽음을 ‘왕생’이라고 부른다. 왕생을 멋진 곳으로 여행을 간다거나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고 여긴다면 이런 죽음도 기뻐할 만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죽음은 환경이 바뀌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며, 한 생명이 또 다른 신체에 의탁하는 시작일 뿐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맞이하면 된다.
그런데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삶은 눈에 보이지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고, 사라지기에 슬프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사실 사람의 생명은 찻잔의 물과 같다. 찻잔은 깨지면 다시 원래대로 될 수 없지만, 물은 탁자나 바닥에 떨어지면 수건으로 닦아 찻잔에 담을 수는 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찻잔과 달리 생명인 물은 한 방울도 덜어지지 않는다.
죽음을 표현한 말로는 불교의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의 경지는 고요하고 청정하다)’이 가장 적절하다. 생겨나지 않으니 죽지 않고, 생겨나지 않으니 사라지지도 않는다. 진정한 생명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초월한다. 바닷물이 커다란 파도를 만들지만 바다 위의 거품은 과연 바닷물일까. 파도일까?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바람도 없이 고요하면 어지럽게 움직이던 것도 결국은 조용해진다. 앞에서 이야기한 찻잔의 물처럼 찻잔은 깨지면 회복시킬 수 없지만, 물은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땔감나무에도 비유할 수 있다. 베어낸 나무는 땔감으로 쓰여 타버리지만, 베고 난 자리에서는 다시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은 쉼 없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신本身은 죽지 않는다.
생명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업’이 있기 때문이다. ‘업’은 신·구·의로 짓는 행위이며, 여기에는 선업善業, 악업惡業, 무기업無記業이 있다. “가히 백천 겁이 지나도 한 번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신·구·의로 짓는 모든 선악의 업은 컴퓨터처럼 업의 하드웨어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종경록』에서는 “인연이 모일 때 과보는 저절로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선악의 업 인연이 무르익으면 모든 것은 자신이 뿌린 만큼 받게 된다. 이것이 인과업보의 불변하는 법칙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생명의 비밀은 ‘유전자’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생명의 비밀(유전자의 또 다른 이름)인 업력業力은 일찍이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미 설하셨다. 업력은 사실 부처님의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이다. 사람의 생명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왔다. 또 현재의 생명은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업력은 세세생생 이어지는 ‘분단생사(分段生死: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의 생사)’를 꽉 묶어주는 새끼줄과 같다. 결코 흩어져 사라지거나 조금도 적어지지 않는다. 업력은 인간이 갈 곳을 결정한다. ‘전생에 지은 것을 알려면 현재 받는 것을 보고, 다음 생에 받을 것을 알려면 현재 짓는 것을 보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악을 짓지 않는 것이 유전자를 바꾸는 길이다.
중생의 생사는 업력에 의해 결정된다. 해탈한 성자는 원력願力에 의지하여 생명을 성취한다. 생사의 순환은 본래 자연의 순리이다. 종륵宗. 선사는 “인간의 생멸生滅은 바다의 물방울과 같다. 물방울은 생겼다가 사라져 결국 물로 돌아간다”는 법어를 남겼다. 도해道楷 선사는 원적할 때 “내 나이 이미 칠십육, 세상의 인연 이미 모두 마쳤도다. 살아서는 극락을 바라지 않고, 죽어서도 지옥이 두렵지 않다네. 모두 벗어놓고 내 몸 삼계 밖에 놓으며, 흘러가는 대로 맡기니 어찌 구속이 있겠는가”라는 게송을 남겼다. 자신의 제를 지낸 뒤 죽음을 맞이하나, 앉아서 입적하거나, 강물에 들어가 노래를 부른 뒤 죽음을 맞이하거나, 산에 올라 직접 땅을 파고 자신을 묻는 등 선자禪者의 죽음을 맞이하거나, 산에 올라 직접 땅을 파고 자신을 묻는 등 선자禪者의 죽음에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수수함이 있다.
입적 때에 시간을 미리 알거나, 몸에 병고와 액난이 사라진 실제 인물과 일화들이 불교에는 많이 전승되고 있다. 이것이 생사를 초월했음을 설명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선종에서는 “죽도록 너의 생각을 두드려 너의 법신을 활발하게 하라” 하였으니, 우리가 진정 초월해야 하는 것은 생각의 생사이다.
우리의 의식은 찰나에 생멸하고 변화한다. 『대승유전제유경大乘流轉諸有經』에서는 “앞의 의식이 멸할 때 그것을 죽음이라 부르고, 뒤의 의식이 일어날 때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실 매 순간 삶과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의식의 나고 죽음, 생각의 나고 사라짐은 폭류瀑流와 같다. 생사의 홍수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념無念이다. 연기성공緣起性空을 체증體證할 수 있다면 “마치 나무인형이 꽃과 새를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만물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해도 어찌 방해가 될거나!” 하는 것처럼, 마음이 외경에 동요됨이 없고, 삶과 죽음은 하나여서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경전에서는 또한 “앞의 의식이 멸할 때 어디로 가는 곳도 없고, 뒤의 의식이 일어날 때 어디로부터 오는 곳도 없다”라고 하였다.
생명은 출생한 뒤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죽어야 끝났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 이처럼 간단하다면 생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질 않는가. 도원道元 선사는 “생사의 생각을 끊어낸 자는 불가의 일대사一大事와 인연이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생사 중에 부처가 있으면 생사를 없게 할 수 있고, 생사가 열반의 이치라는 것을 알면 생사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열반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이로부터 생사를 초탈하기 때문에 오로지 일대사의 인연을 연구할 뿐이다”라고도 했다. 이런 이치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미혹을 끊어 진리를 얻으며, 생사가 곧 열반이라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생사에 미혹되지 않고 생사를 초월한 울타리 안에 안주할 수 있다. 이러면 어찌 죽음이 두려울 손가!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은 뒤에는 이민 가는 것처럼 또 다른 나라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생존에 필요한 자본과 공덕의 법재(法財: 법의 재물)만 있다면 국토가 바뀌어 태어나는 것뿐이니, 생활해 나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은 뒤에 어디에 태어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