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종교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 윤활유 이고 비타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이 종교의 본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뜻을 불자들에게 자주 드렸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불교가 우리 사회에 윤활유 적이고 비타민 적인 역할을 하면서 함께 동사섭 하는 활동을 하고 있을 적절한 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힘들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살 생활에서 실행하는 불자들이 보살이 되어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해 봅니다.
세상은 종종 물질의 풍요 속에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날 그런 부조화 현상을 일으켜 고통과 괴로움으로 힘든 삶에 매몰되어 가는 일들은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들이 세상으로 내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명無明 때문입니다. 무지無智의 소치입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다가 후회하지 말고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불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그중에서도 젊음과 건강과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습니다. 젊음과 건강과 목숨, 그 소중함이 결국은 조화로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어울림을 가질 때, 젊음과 건강과 목숨도 유지됩니다. 조화로운 지수화풍의 어울림으로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내가 되어 성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고 친절한 어울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와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관심과 배려와 친절함으로 대하면서도 가까운 이에게는 오히려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들은 가까우니 괜찮다고 하면서 소홀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울수록 더 관심과 배려와 친절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셀 수 없을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행동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너무 등한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 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이 소중한 날인 것처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을 넘기면 다시는 오늘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면, 내일을 좋은 날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그래도 우리 국민들은 지적 수준과 문화의식 수준이 높아서 세계인들이 겪고 있는 코로나로 인한 고통과 어려움은 잘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 사찰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복된 도량에 소중한 인연이 아닌가 더 깊이 보게 합니다.
20여 년 전 모 기업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은 자식이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아, 나를 닮지 마라.~~~” 그리고 또 푸념하듯 한 마디 내뱉습니다.
“애비 노릇하기 힘들구나.~~~”
그러면서도 강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가부장적인 결심을 저버리지 않고 굳건히 살아왔던 분들이 우리네 어버이들 이십니다.
우리네 아버지,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러하셨듯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어렵고 힘든 환경에 노출되어있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고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불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에 머무르는 순간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매몰되어 간다고들 합니다. 내 인생, 내 삶, 내 생활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며, 가꾸려 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이어가려는 이들이 점 점 점, 너무 많이들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한 번만 접어보면 어떨까요?
은사 스님과 친한 도반이셨던 불광사 불광법회의 법주 이셨던 광덕 큰스님께서 10대 소년 이였던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우!, 금생今生에 한 번만 이 세상에 안 태어났다고 생각을 해봐라.
부처님 제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면 힘과 용기와 지혜가 드러날 것이다. 한 번만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요량으로 살아봐라.”
지금도 생각해보면 안 태어났다는 그 생각 하나,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기중심적인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또 군에 복무하고 있을 청년일 때 석주 노스님께 이렇게 여쭤봤습니다.
“스님, 참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참 수행, 노스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심下心 하고 인욕忍辱하는 것이다.”
나를 낮추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라는 그 가르침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속에 늘 살아있는 가르침으로 숨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요량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타적利他的인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 모든 일을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것이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불자님들께 전합니다.
구룡사와 여래사 등 불사佛事를 앞두고 항상 스스로 다짐하고 확인했던 게 있습니다. 불사란 부처님의 일입니다. 부처 불佛자 일 사事자, 부처님 일입니다. 부처님 일이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불사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공간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지닐 수 있는, 부처님이 늘 하셨던 그 일을 우리도 하겠다는 서원이고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불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사를 일념으로 매진할 수 있는 일들이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로서 복된 인연을 맺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그 일을 시작할 때면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요량으로 시작하고 그 일을 마치고 되돌아설 때면 그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땐 천년만년 살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고, 하루를 열심히 살다 저녁에 누울 때는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 않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의 언론 방송 유튜브 SNS 등을 보면, 어떤 것이 진짜 방송이고 어떤 게 거짓 뉴스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더 혼탁해져 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깊은 산중에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갈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서 사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 함께 어울리면서도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산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늘 마음이 번다하다면 그는 비록 산속에 있으나 본마음은 번다하고 분주해서 장터에 앉아있는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록 현재 몸은 시장 통로에 있든, 그 어디에 있든지 고요적적한 자기 마음의 분상을 잃지 않고 몸도 마음도 고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집착이 많으면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본분사本分事를 잊어버리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나와 깊은 인연을 맺은 부모 형제 처자 권속들은 영혼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세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와 가까운 이들은 어디에 있어도 마음속으로 늘 잘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가까이에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안목眼目이 부족해서 부처님 깨달음의 안목인 눈과 지혜가 없어서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과因果를 믿고 윤회輪迴를 부정하지 않으며 살면 어디엔가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어느 곳에, CCTV 영상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볼 수는 없지만, 나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부모와 형제자매와 처자의 인연이 구천에 떠도는 영가靈駕는 되어있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될 것입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 실천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이 자리이타의 삶이 될 수 있는 여건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작지만 작은 것 하나 하나부터 보살도를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면서 오늘도 우리 모두의 보살도 실천을 염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