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암 추붕(雪巖 秋鵬, 1651~1701)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스님의 법명은 추붕秋鵬이고 호는 설암雪巖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평안남도 강동江東에서 출생했다. 스님은 가냘프고 여윈 모습에 위엄이 없고 빼어난 데가 없었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형형炯炯하여 그 빛이 사람을 쏘아보면 압도될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계행戒行이 매우 높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하였다. 특히 사람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론할 때의 예봉銳鋒은 불꽃이 일어나듯 정열적이었으며, 샘물이 솟아나듯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스님은 처음에 종안宗眼 장로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뒤 벽계 구이碧溪九二 선사를 찾아가 참배하고 몸소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면서 경론을 배워 통달하였다. 설암 스님이 뒷날 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 대사를 찾아가 예를 올리자 두 분은 서로 투합하듯이 서로 뜻이 맞지 않는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월저 스님은 설암 스님이 특이한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리고 제자로 받아들여 의발을 전해 주었다. 월저 스님은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경의 대가로 이름이 높아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렸다. 동사열전은 스님이 “항상 종풍宗風을 거양擧揚할 때마다 자리 아래 모여드는 청중이 항상 수백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법석法席의 성대함이 근세에는 없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스님의 전법傳法 제자인 설암 스님은 일찍이 스승에 대하여 “스승님은 경을 해석할 때 세세한 구절과 항목에 구애받지 않고 그 대지大旨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으며, 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여 크건 작건 빠뜨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제자 역시 스승의 학문과 공부법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스승을 능가할 만큼 학문적 진전을 보았다.
설암 스님은 10여 년간 월저 스님의 문하에 머무르며 수학한 후 남방으로 내려와 불법을 홍포하였다. 남쪽 지방을 유람하니 남방의 모든 스님들은 높은 명망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여(望風) 그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하였다. 다음은 스님이 뒤떨어진 당시 불교계의 불교학 연구에 매진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묘향산의 설암 선사雪巖禪師는 평소 이 전적으로 마음이 노닐 도량을 삼고, 또 보배 구슬로 여기셨다. 그는 이를 애석해하며 “참으로 설산 동자雪山童子의 반쪽 구슬이로다.” 하고는 그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여 온전하게 하고자 간절히 원하셨다. 그래서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람 편에 두 번 세 번 구매하려고 했으나 얻을 수 없었던 것이 여러 해였다. 그러다 우리 월저 대사月渚大師를 만나 남쪽 땅에서 초본을 얻게 되었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독려하고 판각하여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일을 마쳤고, 짝을 찾아 넣어 온전한 보배로 만들었다.(「화엄경후발華嚴經後跋」, 허정집虛靜集하)
인용문은 설암 스님이 청량의 화엄소초를 복원하여 간행한 일을 두고 제자 허정 법종虛靜法宗 스님이 설암 스님을 칭송한 글이다. 즉 청량 징관 스님은 모든 장경藏經의 연원이요 수많은 전적들의 근원인 화엄경 그 근원을 탐색하여 현묘한 뜻을 원융하게 펼치고 큰 종지를 밝게 선언하였으며, 이것을 소초䟽鈔로 삼아 그 경을 해석하고 그 소䟽를 소통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초본鈔本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유행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신유년(1681)에 대장경을 실은 선박이 표류하다가 임자도荏子島 강변에 정박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계 백암曹溪栢庵 스님이 이 경을 획득하여 문인들을 시켜 판각하게 하였는데, 단 홍자洪字 한 권이 풍랑에 유실되어 온전히 간행되지는 못하였다. 설암 스님이 급기야 스승인 월저 도안스님으로부터 유실된 반쪽을 얻어 판본으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설암스님은 동시대의 백암 성총栢庵性聰(1631~1700) 스님이 임자도荏子島에서 불경을 수습한 이래(1681년) 새롭게 전개된 불교학 연구의 학풍을 백암 스님과 함께 이끌어 간 인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두 스님은 조선의 불교학을 중흥시킨 인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설암 스님은 조선의 불교계에서는 보기 드문 선문염송설화 역시 간행하였다.
과거 승국勝國(고려)에서는 국조國朝가 선법禪法을 간성干城으로 삼아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명운을 연장하였다. 당시에 선법이 성행한 것은 중국에 못지않았다. 그러므로 산성散聖 목우 옹牧牛翁(知訥)의 사법嗣法 제자인 무의자無衣子 심 공諶公(혜심慧諶)이, 선문禪門의 호걸들이 본사本師(釋尊)의 가르침 및 가섭迦葉 이하가 보여 준 것 중에서 혹 염고拈古하고 송고頌古하거나, 혹 대어代語하고 별어別語한 것 가운데 어록語錄에 산재한 자료를 취집하여 30권으로 편집하고는 염송대별략拈頌代別略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은미하고 간략한 데다 내외의 제서諸書에서 많이 나온 까닭에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로 하여금 아득해서 알 수 없다고 오히려 비방하게 하는 허물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귀곡龜谷 운 공雲公(覺雲)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는 별도로 설화說話를 첨가하여 설명하였다. 송宋나라 사람이 뽑아 올린 것이 묘苗에게는 해가 되겠지만, 수모水母의 입장에서는 새우의 조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니, 후진後進에게 도움이 되는 점이 실로 적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판본이 당세에 성행하였으나, 산하가 한번 뒤바뀌면서 나라와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아, 그로부터는 학자들이 이 책을 구해 보기가 무척 어렵게 되었다.(「중간선문염송설화서重刊禪門拈頌說話序」, 무용당유고無用堂集하)
선문염송설화는 고려의 진각국사가 찬술한 선문염송에 조선의 구곡 각운 스님이 후학을 위해 설화를 첨가한 책이다. 그 판본은 고려에서 성행한 것과는 달리 불교가 탄압받았던 조선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월저 도안 스님이 이것을 오래도록 개탄하다가 다행히 한 곳에서 고본古本을 얻어 묘향산에서 판각하려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설암 스님이 남쪽인 팔영산八影山 능가사楞伽寺에서 간행하였다. 설암 스님의 선문염송설화간행은 조선 불교계의 남북이 한목소리를 내고 스승과 제자가 불법 선양을 같이하게 되었으니, 설암스님이야말로 스승의 뜻을 잘 계승했다고 할 만하다. 스님의 저술 선원제전집도서과평禪源諸詮集都序科評과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 2집集의 과문科文과 사기私記 2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스님은 대흥사 13대 종사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하다. 불법이 쇠퇴했던 시대에 불교중흥에 기치를 내세운 공로였을 것이다. 스님은 1706년(숙종 32 ) 8월 5일에 입적하였다. 세속 나이 56세였다.
人間膏火謾煎熬인간고화만전오 인생살이 고화膏火가 부질없이 타오르는 것
厭彼塵區訪列曺염피진구방열조 저 풍진세상 싫어해 선지식들 탐방하셨지
華表鶴歸天漠漠화표학귀천막막 화표華表에 학 돌아가니 하늘은 막막하고
金河雲散水滔滔금하운산수도도 금하金河에 구름 흩어지니 물결만 도도하군요
眞乘道德元來業진승도덕원래업 진실한 교법의 도와 덕이 원래의 업이요
餘事文章不足褒여사문장부족포 문장은 여사餘事니 기릴 만한 것 못 되지요
尙有寒林薪盡地상유한림신진지 아직도 한림寒林에는 땔감 사그라진 땅이 있고
妙峯蒼翠仰彌高묘봉창취앙미고 짙푸른 묘한 봉우리 우러를수록 더욱 높군요.
-설암 화상을 애도하며(悼雪巖和尙), 허정집虛靜集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