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일 _ 현대불교신문 취재부장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 못하고 교세 위축을 그대로 방치하면 한국 불교는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지난해 9월 조계종 모 종책 모임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중앙승가대 김응철 교수는 향후 10년 동안 불교인구가 감소할 것을 예견하며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종교 인구에 대한 본격적인 통계조사가 시작된 1985년 자료를 포함한 통계청 조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연령별 지역별 교차 분석한 결과 10년 후 종교지형의 변화를 예측한다면 불교계는 그렇게 낙관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우려를 나타내고“향후 100여개 이상의 도심포교사찰이 성공을 거둘 수 있어야 한국불교의 성장을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교세 확장에 큰 영향을 미칠 한국불교 도심 포교의 현 주소는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또한 어렵다는 도심 포교의 성공은 과연 요원한 일일까? 타 종교와 의 비교와 함께 성공 사례를 통해 도심 포교의 필요성과 나아가야할 방향을 그려본다.
가톨릭은 1985년에 비해 20여 년간 전국적으로 큰 성장을 가져왔다. 당시 가톨릭은 원불교와 비슷한 교세로 불교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불교가 훨씬 우위였고 향후에도 이런 현상은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년 만에 이러한 낙관적 예측은 정확히 빗나갔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은 교인들이 모이는 성당을 인구집중 지역인 대도시에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이다. 이는 신도 확대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서울시내의 경우 개신교 인구는 동대문구 외 모든구에서 불교를 앞선다. 하지만 가톨릭은 강남을 비롯한 부유한 지역 구 단위에서 불교를 앞서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포교(선교)의 근간을 효과적으로 마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교계는 도심포교를 책임지는 사찰이 거의 없다. 구룡사 능인선원 불광사 봉은사 등 대표적 사찰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30 만 신자를 거느린 대형교회가 셀 수 없이 많다. 아무리 큰 규모의 사찰이라도 이들과 대적하기란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가톨릭 성당 또한 비록 수적으로는 불교에 뒤질지라도 전략적 지역 거점을 최적화해서 배치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앞서 있다. 도심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불교도 포교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는 게 교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즉 용주사 범어사 봉선사 같은 교구 본사급 사찰도 더 이상 산중사찰로서가 아니라 주변지역의 도시화가 가속화 되는 만큼 도심 포교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지역불자부터 늘리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돌이켜 보면 강남의 대형포교당이 있는 곳에서 해당지역의 불자의 수는 오히려 감소했다. 질 높은 불교대학을 원하는 이들이 몰리면서 신도의 수평 이동만 일으켰을 뿐 실질적인 불교인구의 증가에는 큰 도움이 안됐다는 것을 증명한다.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특정 몇 개 사찰이 사활을 걸고 포교를 해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더 이상 도심포교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주력하지 않으면 곤란해 질것이다.
이제는 종단 차원에서라도 예산을 확보해 신도시에 종교 부지를 확보하고 도심포교사찰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서울 인근 수도권 불교인구 감소를 지속적으로 방치한다면 한국불교의 미래가 없다. 이와 함께 한시바삐 다양한 성공모델도 만들어 내야 한다. 수도권의 모 스님은 40평 전세건물에서 포교당을 시작해 5년 만에 20여억 원이 넘는 불사를 일으켰다. 종단이 도심 포교전담사찰을 적제적소에 배치하고 역량 있는 스님들을 파견하면 얼마든지 위기를 극복하고 반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수원포교당’주지 성관 스님과 대구 관음사 영남불교대학 학장 우학 스님의 도심포교 성공사례는 불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환경이나 여건이 열악한 것은 분명 하지만 포교 전략을 효율적으로 세워 실천해 간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줬다.
수원 포교당
3대 도심 포교당 중의 하나로 꼽히는 수원포교당 지금이야 도심 속에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20 년 전 주지 성관 스님이 이곳에 부임할 때만 해도 사정은 열악했다. 첫 법회를 해보니 모여든 사람이 겨우 100명 정도였다. 도심 사찰치고는 기대 이하 수준이었다. 신도 수보다 더 문제는 전반적인 절의 관리 상태였다.
우선 성관 스님은 신도들의 교육부터 시작했다. 곧바로 <금강경>을 가르쳤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 었다. 처음 주지실에서 5~6명을 모아 시작한 강의는 얼마 되지 않아 30~40명으로 불어났다. 좁은 방에서는 더 이상의 교육이 불가능해 법당 뒤에 조립식 가건물을 짓고 교육을 본격화했다. 1988년에는 20주 과정의 기초 교리강좌를 개설했다. 절 앞에 플래카드만 내걸어도 수강생이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30기가 졸업한 이 강좌 수료생은 교수, 의사, 변호사에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6000여명이 넘는다.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은 신도조직이었다. 당시만 해도 신도는 나이 든 여성들이 주축이었다. 스님은 부임 이듬해인 1987년 남성 신도들의 조직인 ‘거사회’를 창립, 절의 분위기를 일신한다. 기초교리 강좌를 수강한 이들로 봉사단체인‘반야회’를 만들었고, 청년들로는 신행청년회를 창립했다. 교육과 조직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자 문화포교도 본격화했다. 부임 얼마 후 불교전문지를 발행하며 서점을 열었던 스님은 역량이 축적되자 아예 연건평 1000평 규모의 초현대식 불교문화원을 건축했다.  이 문화원에서 그는 대금과 단소, 살풀이 무용이 어우러지는 공연을 펼치는가 하면 나혜석추모음악회, 국악관현악단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을 기획, 포교당을 지역문화의 중심지로도 재탄생시켰다.
대구 영남불교대학·관음사
대구시 남구 봉덕3동 대로변에 자리잡은 이 사찰의 연건평만 5000여평. 건물에는 크고 작은 법당과 강당을 비롯해 수행관, 학림(강원), 선방, 출판사, 방송스튜디오, 신협, 어린이집, 보건실, 사진관, 갤러리, 도서관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 많은 각종 시설들 가운데, 놀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10만명이 넘는 신도들은 시간만 나면 절로 나와 수행 하거나 공부를 한다.
주지 우학 스님이 영남불교대학·관음사를 연 것은 1992년. 대구시 남구청 앞 4층짜리 건물의 맨꼭대기층 70평을 보증금 3000만원, 월세 50만원에 임차한 허름한 공간에서였다. 동안거를 마친 뒤 걸망 하나 짊어진 채 대구를 지나다 불교 포교당이 망해 다른 종교의 간판을 내건다는 말을 듣고서 오기가 발동했다. 보증금을 구하기 위해 속가 부모 형제까지 찾아가 손을 벌렸다. 교육이 중요함을 인식한 스님은 영남불교대학을 만들고 교리 강좌부터 시작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첫 개강 때 120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어 법당을 꽉 채웠다. 주변에 불교대학이 많지 않았던 것이 주효한 것이다. 불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알고 시작한 우학 스님의 포교 전략이 처음부터 먹힌 것이다. 스님은 1시간을 가르치기 위해 10시간 이상 연구하고, 준비하며 강의에 혼신을 다했다.   불교대학이 자리를 잡자 스님은 수행법 강의에도 눈을 돌렸다. 염불, 독경, 사경, 절 수행 등 한국 불교 전통 수행법과, 남방불교나 티베트 불교의 수행법에도 마음을 열었다. 특히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장점을 취한 선관쌍수(禪觀雙修) 수행은 이 절에서 강조하는 수행법 중 하나다. 이렇게 공부와 수행의 병행을 외치며 절을 이끌어 온 지 약 15년, 1년 과정 수료 신도 10만명 , 10년 교육과정 수료신도 4천명을 달성하는 대성공을 이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