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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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무원장 격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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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사와 도심포교 2
    구룡사와 도심포교 3
    불교잡지의 역사와 방향
    월간붓다의 어제와 오늘 1
    월간붓다의 어제와 오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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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미래 인재양성에 있다

성원 스님 _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필자는 월간 붓다의 역사인 20년 동안 월간 붓다와 함께 살아왔다. 필자는 월간 붓다와 더불어 과거에는 기쁠 때는 웃었고 슬플 때는 울었고, 현재에는 웃고 울고 있고, 미래에도 웃고 울 것이다. 필자는 당위의 측면에서 월간 붓다와 함께 언제나 웃고 울어야 한다. 필자와 월간 붓다는 운명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월간 붓다는 필자의 은사 스님인 정우 스님과 더불어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월간 붓다와 더불어 정우 스님이 추구하는 불교 이념을 구체화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정우 스님이 추구하고 있는 불교이념을 정우이즘으로 명명하고 싶다. 즉 필자는 정우 스님의 불교 사상 또는 불교 이념을 정우이즘이라는 신조어로 부르고 있다. 월간 붓다는 정우이즘을 모태로 창간되었고, 이제는 20주년 240호의 발행을 기념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우 스님이 불교의 지도자인 이상, 정우이즘은 우리 불교의 역사적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 스님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한국과 세계의 사회 역사적 맥락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셨던 그 당시의 인도와 세계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정우이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조직은 그 나름대로의 강령을 가지고 있고 그 강령에 의해서 움직여야 한다. 어떤 조직이 체계화된 강령을 가지고 있고 그 조직 속에서 그 강령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켰을 때 우리는 그 조직이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우 스님이 창건한 국내외의 무수한 사원들과 포교당들도 정우이즘에 의해서 움직여야 한다. 정우이즘이 아직 체계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우이즘을 좀 더 체계화 시켜야 하고 정우이즘을 포교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 정우이즘이 정우 스님이 창건한 그 조직들 속에서 적용되었을 때, 정우이즘은 이미 정우 스님의 개인의 이념이 아닌 그 조직의 사회화된 공동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다.

정우이즘은 정우 스님 개인의 사유물이 아닌 우리 월간 붓다의 독자 모두의 공유물이다. 정우이즘은 정우 스님 개인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월간 붓다를 사랑한 애독자들과 기고자들에 의해서, 그 정우이즘은 빛을 발할 수 있고, 체계화될 수 있다. 정우이즘은 게다가 우리 월간 붓다에 20년 동안 글을 써주신 무수히 많은 기고자들에 의해서 발전계승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월간 붓다 창간 20주년 기념호의 발행은 20년 동안 월간 붓다를 사랑하여 주신 무수히 많은 애독자들과 기고자들이 자축 할 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개인적 가르침이 불교 교단 속에서 실현되었을 때 그 가르침은 우리 불교도들의 공동 이념이 된 것이다. 우리 불교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실천할 때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념은 우리 불교도들의 이념이 된다.

창조론을 기반으로 하는 유신론의 종교들과 다르게 불교 이념은 연기를 교리적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불교 이념은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 불교의 경전은 사회 역사적으로 포용성을 가지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불교의 이념은 고착되지 않고 역사와 더불어 전개될 수 있다.

유신론의 종교들의 경전들은 화석화되고 변화를 거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유신론의 종교들은 무오류와 무변화를 신봉하는 경전 해석학을 받아들여 정통교리 (Orthodoxy) 라는 단어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그런 유신론의 종교들과 다르게 경전 성립의 사회 역사적 변화와 맥락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 불교는 정통실천 (Orthopraxy) 이란 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교단의 역사에서는 승단의 규율을 규정하는 율장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불교를 실천하지 않는 불자는 불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규율대로 살지 않는 스님도 스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우이즘이 불교의 범주 안에 있는 이상, 정우이즘은 유신론적 해석의 틀인 정통교리의 측면보다는 불교의 정통실천의 측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정우이즘이 정우 스님의 개인의 이념으로 화석화되고 교조화될 때, 정우이즘은 그 생명력을 상실한다. 우리 월간 붓다의 기고자들과 독자들은 이 월간지가 정우 스님 개인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의 이념을 실현하는 매체적 도구로 인식하였을 때, 정우이즘은 불교적 맥락에서 자리를 확고히 잡을 수 있다. 정우이즘은 정우 스님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 월간 붓다의 가족들의 공동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면, 정우이즘의 지향점은 어디에 있었는가?
첫째, 정우이즘은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살자는 것이다. 불교가 대중들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불교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정우이즘의 이론의 처음과 끝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이즘의 실천의 모델은 석가모니 부처님 그 자신이다. 정우이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 시대의 한국과 세계 속에 어떻게 실현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이다. 정우이즘은 불교라는 보편적인 이론적 토대와 현 시대의 한국과 세계라는 특수한 실천적 토대를 전제로 성립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정우 스님의 포교당 건립 운동과 대중포교는 가능한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살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어느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승한 데, 요즈음 한국 사람들은 불교를 많이 믿지 않는다”고 우리 한국의 불교도들이 자주 말을 한다. 그렇지만, 그 문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문장에 논리적 모순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불교의 교리가 수승한데도, 한국인이 우리 불교를 믿지 않고, 수승하지 못한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우리 한국의 불자들이 믿고 있다면, 최소한 두가지 가설이 성립한다.
첫째 의 가설은 불교가 수승하다고 믿는 우리 불교도들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첫째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한국의 불교도들이 불교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억지 춘향식으로 보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불교가 수승하지 않는 데, 불교를 수승하다고 보는 한국의 불교도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의 가설은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둘째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우리 한국인의 지적 수준이 수준미달이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선, 첫째 가설을 검토해보자. 우리 불교를 다른 종교와 평면적이고 단선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고 보지 않지만, 필자는 우리 불교가 어느 종교 못지 않게 또는 어느 종교보다 매우 우수하다고 보고 있다. 불교를 믿는 한국의 불교도들은 제대로 불교를 보고 믿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첫째 가설은 반박될 수 있다. 다음, 둘째의 가설을 검토 해보자. 한국인의 교육수준은 세계적이고, 한국인은 정말로 어느 민족과 겨루어도 뒤지지 않는 민족 이기 때문에 필자는 둘째의 가설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 한국불교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필자는 우리 한국의 불자들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우이즘이 표방하고 있듯이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가 한국 사회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불자들이 제 각각 부처님처럼 살았다면 우리는 포교를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 불자 들이 무뉘만 불자였지 우리 불교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데 인색했고 우리 불교의 가르침을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에 우리 불교가 한국의 사회 속에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는 어느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승한 데, 요즈음 한국 사람들은 불교를 많이 믿지 않는다"고 우리 한국의 불교도들이 애정을 가지고 역설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정우이즘은 불자들에게 불교를 문화로 접근시킨다. 불교는 불자 개개인에게 삶의 윤활유가 되어야 한다. 불교는 불자의 삶의 문화 속에 융해되어 그 삶의 문화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불교와 불자 개개인이 별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불자 개개인의 삶이 하나로 되어야 한다. 정우이즘은 불자들이 출생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불교적으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전인 불교의 완성이 정우이즘의 또 다른 특징이다. 포교당의 건립 운동과 더불어 정우 스님은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각 포교당에 개설하여 그 지역의 불자들과 주민들을 위해서 운영해야 한다고 각 포교당의 책임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정우 스님은 어린이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상당수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고 문서 포교의 측면에서 월간 붓다를 창간하였고 도서출판 일주문을 설립하였다. 정우 스님은 불자들에게 양질의 성지 순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 수미산 세계 여행사와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신시 뮤지컬 컴퍼니와 신시 씨어터를 주 도적으로 창립하였다.

세째, 정우이즘은 한국불교의 국제화의 산물이다. ‘한국불교’라는 범주 개념에서, ‘한국’이라는 특수성과‘불교’라는 보편성에서, 정우이즘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정우이즘의 물적 기반은 구룡사, 여래사 그리고 그 이외의 무수한 국내외의 포교당이고 그 인적 기반은 그 사원에 소속된 구성원들이다. 이 모든 조직은 모두 한국불교 불보종찰인 통도사를 모태로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정우이즘은 한국불교 전통의 특수성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정우이즘은 좁게는 통도사, 크게는 한국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우 스님이 2007년도에 통도사 주지가 되어 통도사를 이끌
어가게 된 것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이즘은 한국의 어느 불교 조직보다도 불교의 보편성을 지향했다. 정우이즘은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정우이즘은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금자탑을 이루었고 세계 일화의 큰 이상과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필자는 정우이즘의 한국불교의 국제화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정우 스님은 불교의 원류를 찾아 인도의 불교 성지에 불교의 씨앗을 되살리려고 많은 지원을 하였다. 대한 불교 조계종 통도사 인도 분원을 몇군데 창건하였다. 정우 스님은 부처님의 성도지인 보드가야에 고려사를,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 녹야원을 주도적으로 창건하였다. 인도의 히말라야 산맥의 한 중턱에 설산사를 창건하여 우리 구룡사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한국불교를 연마한 인도 현지인인 쉐둡 스님을 주지로 임명하여 현지인들에게 불음을 전달하고 계신다.

둘째, 정우 스님은 망명 상태의 티베트 불교와 난민들을 오랫동안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정우 스님은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성하를 매우 존경하고 계시고 현재 남부 인도 소재의 티베트 망명 정부의 데붕 승원에 계시는 링 린포체와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계신다.
현재의 링 린포체는 현재의 달라이 라마 성하의 스승인 링 린포체의 환생자이다. 필자도 정우 스님의 음덕으로 5000 여명의 티베트 스님들과 더불어 데붕승원에서 1년여 간 내부에서 티베트 불교를 볼 수 있었고 티베트 불교를 티베트의 전통 스타일로 연구할 수 있었다. 티베트 불교를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연구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데붕승원의 1년여 간의 체재 경험을 통해서 티베트 불교를 매우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셋째, 정우 스님은 오래 전부터 일본 불교 그리고 중국 불교와 교류를 하고 있다. 구룡사는 오래 전에 일본 정토진종 사원들인 후꾸오까의 정행사와 도야마의 교원사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그 사원들과 꾸준히 종교적 교류를 하고 있다. 필자가 일본의 동경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1년간 있는 동안에는 정우스님의 배려로 정행사 동경분원에서 머물면서 일본의 정토진종을 내부에서 볼 수 있었고 일본 불교를 연구할 수 있었다. 정행사는 영국에 분원을 개설하였고 일본 전역에 분원을 가지고 있고 일본 전통 문화인 아악을 계승하고 있고 세계 평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넷째, 정우 스님은 또한 세계 최대의 불교 네트워크를 자랑하고 있는 대만의 불광산사와도 교류를 꾸준히 하고 있다. 대만 불광산사는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인 성운 대사님께서 만든 사원이다. 필자도 대만 불광산사가 자금을 투자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엔젤레스에 설립한 웨스트 대학에서 2004년 여름 학기부터 2007년 봄 학기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다양한 불교 전통의 스님들과 불자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필자가 만 3년동안 웨스트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한 동안 불광산사의가족들은 성운 대사님과 필자의 은사인 정우 스님과의 깊은 인연 때문에 필자를 불광산사의 가족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하와이로 온 이래로 필
자는 불광산사의 하와이 분원의 가족들과 가족처럼 잘 지내고 있다.

다섯째, 정우 스님은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외로 이민을 가고 난 후에도 한국의 불자들은 본인들이 믿고 있는 종교인 불교를 자신들의 이민지에서 믿고 있다. 미국에도 100여 개의 한국계 불교 사원들이 있고 한국인 이민자들이 그 사원들에서 신행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미주의 한국 불교는 벌써 고인이 된 숭산 스님, 법안 스님과 도안 스님 그리고 필자가 현재 모시고 있는 하와이의 대원 스님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정우 스님은 법안 스님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뉴욕의 원각사를 법안 스님의 뜻을 받들어 통도사 미주 분원으로 몇 년 전에 등록하였다. 원각사 이외에도 정우이즘을 따르는 몇 군데의 미주 분원이 있
다. 호주와 캐나다에도 정우 스님이 관여하고 있고 지원하고 있는 통도사 분원이 몇 개 있다.

정우이즘의 다음 단계는 세계각지의 현지인 포교이다. 한국불교의 세계화의 궁극점은 현지인 포교에 있고 현지인에 의해서 그 불교를 그 나라의 현실에 맞게 토착화해야 한다. 이 때에, 한국불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성을 확보받을 수 있다. 우리의 역량이 현지 포교에 본격적으로 나설만큼 성숙되지 않았고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던 원각사 부주지인 지광 스님과 미국인인 대성 스님이 원각사에서 미국 현지인 포교에 곧 진력할 것이다. 필자도 세계의 유수한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치고 있으면서 정우이즘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필자는 문서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미국 현지 출판사인 불루 파인(청송)을 몇 년 전에 설립하여 세계적인 주요 서적 배분망들을 통해 좁게는 한국 불교, 넓게는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성하의 이념은 스노우 라이언 출판사를 통해서 세계화되고 있고 트룽파 린포체의 이념은 샴발라 출판사를 통해서 국제화되고 있고 성운 대사의 이념은 붇다쓰 라이트 (불광) 출판사를 통해서 세계화되고 있다. 필자의 불루 파인 출판사가 아직은 스노우 라이언 출판사, 샴발라 출판사 그리고 붇다쓰 라이트 출판사에 비해서 규모가 작고 경제적으로 영세하지만 정우이즘은 불루 파인 출판사를 통해서 차근차근 글로벌화 되고 있어 멀지 않아 글로벌화 될 것이다.

넷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니 결론적으로, 필자는 아래의 말을 하고 싶다. 이 글의 명백한 결론은 “정우이즘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불교는 무수히 명멸해간 무명의 그리고 유명의 선배 스님들과 불자들의 결정체이다. 즉, 오늘의 한국불교도 유명의 그리고 무명의 스님들과 불자들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오늘의 한국불교가 제 구실을 하고 있다고 우리가 자신있게 평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한국불교의 구성원인 유명의 그리고 무명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제 구실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오늘의 한국불교가 제 구실을 하고 있지 않다고 우리가 평가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한국불교의 유명의 그리고 무명의 스님들과 불자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와 같이 미래의 한국불교도 결국 우리 스님들과 불자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정우이즘의 미래를 위해서 아니 우리 한국불교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 월간 붓다의 독자들과 기고자들에게 한국 불교의 인재 양성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간곡히 그리고 감히 부탁을 드리면 서 필자는 이 졸고를 마무리하고 싶다.


성원 스님은 월간 붓다의 발행인인 정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동국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불교학과 철학을 수학 하였고, 미국의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의 동경대학교와 인도 소재의 티베트 망명 데붕 승가대학에서 연구원으로 봉직하였고,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의 웨스트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였고, 현재는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불교철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