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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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그룻
우승미 소설가

얼마 전 클래드 재질의 냄비 세트를 샀다. 유로스타일이라는 문구가 꼬리표처럼 달린 냄비였는데, 유럽 요리사의 주방 천장에 걸려 있을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살림날 때 혼수라고 할 만한 것을 해오지 않은 나는 대형마트나 시장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사들여왔다. 당연히 진열까지 할 만한 그릇은 없었고, 냄비든 밥공기든 접시든 어울림 없이 제각각 이어서 보이지 않는 구석에 꼭꼭 숨겨두곤 했다. 처음으로 장만한 세트 냄비가 좋아서 요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남는다는 미네랄 얼룩까지 지우느라 중성세제로 식소다로 식초 탄 물로 씻고 닦고 끓이다가, 냄비를 모시고 산다고 남편에게 빈축을 사기도 했다.

애초에 냄비 세트를 살 계획은 없었다. 오래 사용한 프라이팬의 테프론 코팅이 벗겨져 새로 장만하려던 것이 냄비 세트까지 사게 된 것이다. 프라이팬의 코팅이 벗겨지면 유해물질이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테프론 코팅 자체에 대해서도 유해성 논란이 일면서 한동안 세간이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기왕에 사는 것, 좀 더 안전하고 좋은 그릇을 사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손쉽게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는데, 어떤 것들은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이제는 상투적인 표현으로까지 느껴지는 지금,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유기농 채소를 선호하고 화학조미료를 피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온갖 유해성 물질로 뒤덮인 환경 속에서 스스로 건강을 지키려고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릇의 안전성 대한 글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우리 주변의 그릇들이 대부분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요즘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버리고 유리 제품으로 교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유리 제품도 완전하게 무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100% 규조토로 만든 유리는 안전하다. 그러나 주방에서 사용하는 유리의 상당수는 강화유리나 크리스털 제품이다. 강화 유리는 제조 과정에서 합성수지가 첨가되고, 크리스털 제품은 규조토에 금속 성분을 섞어 만드는데 때로 납이 검출되기도 한다. 나무도 재질 자체는 안전하지만 방부처리나 표면의칠감에 문제가 있다. 도자기도 마찬가지다. 도자기 재료 자체는 안전하지만 유약의 종류에 따라 유해성이 판별되는데, 눈으로만 보아서는 그 유해성을 알 길이 없고, 가격이 비싼 도자기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색깔이 원색으로 화려한 도자기나 표면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고 한다.

결론은 스테인리스였다. 저가에 유통되는 제품 중에 알루미늄에 코팅한 제품이 있다고 해서 믿을 만한 국내 제조사에서 만든 통삼중 냄비를 사들이게 된 것이다. 예상에 없던 지출이어서 출혈이 있긴 했지만, 건강을 위한 것이기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건강을 유지하려고 먹는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냄비를 사면서 많은 그릇을 버렸다. 거의 플라스틱 재질의 보관용기였고, 남편이 자취할 때부터 사용했던 값싼 도자기 그릇과 살림날 때 사들인 냄비들이었다. 친정 엄마가 사준 경질 압력솥도 망설이다가 버렸다. 오래 사용하면 경질 피막이 마모되면서 알루미늄이 드러나게 되는데, 알루미늄은 장기간에 걸쳐 다량으로 섭취하면 골연화증, 골다공증, 아토피, 치매 등을 유발한다고 한다.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 그 많은 그릇을 버리고 나니 어쩐지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후련하고 시원한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스테인리스와 유리제품들이 어느 순간에 차갑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도 새것들이 뿜어내는 반짝임에 익숙 해지지 않았다. 유로스타일이라는 냄비들이 하나같이 둥글지 않고 각진 것들이어서 설거지를 할 때든 조리를 할 때든 손에 딱 붙지 않고 겉돌았다. 마음에 꼭 들어서 장만한 제품에 어째서 정이 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그릇에 관한 책을 썼던 환경 정의시민연대 지도위원 이진아 씨의 글을 읽고 나서였다.

이진아 씨는 식기로 이조백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삼사백 년 전에 만들어진 값비싼 골동품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그릇으로 무늬가 없는 흰색의 사기그릇을 이조백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사용한지 10년 이상이 된 오래된 그릇들로 살 때에는 유해성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으나, 사용하는 동안 표면의 유해성 물질이 씻겨나갔으리라는 것이 이진아 씨의 의견이었다. 내가 버린 오래된 도자기 그릇이 실은 새로 산 그릇들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안전한 그릇’이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버린 그릇들이‘오래된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자취방에 있었던 값싼 도자기 그릇은 화학성분의 유약을 바른 중국산이 틀림없을 테지만, 연애시절 남편과 조촐하게 겸상할 때 사용하던 그릇이었다. 음식이 담기고 비워지고 씻기는 동안 그릇 안의 우멍한 공간에 함께 했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간 그릇이었다. 표면이 벗겨진 경질 압력솥은 살림날 때 혼수조차 변변히 챙겨주지 못한 병상의 친정엄마가 생전에 딸에 대한 미안함으로 챙겨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 오래되어 다정한 그릇들을‘웰빙’이라는 경박한 욕심으로 후련하게 버렸던 것이다.

‘그릇은 비워졌을 때 온전한 그릇이 된다’는 오세영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나는 그릇을 채울 줄만 알았지 비울 줄은 몰랐다. 그릇에 배를 채울 음식만 담을 줄 알았지,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무형의 추억은 볼 줄 몰랐다.
내가 버린 그릇들이 재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릇이었을 때의 형태가 부수어지고 스러져, 흙이었던 것은 흙으로 금속이었던 것은 금속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버려지고 부수어짐으로써 그 그릇들은 온전한 그릇이 됐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비워져 형태조차 없어지는 것, 아마도 그것이 그릇이 찾은 진정한 본래의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