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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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이유
우봉규
작가, 불교신문 논설위원
 
이스라엘의 지상전 개시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피와 암흑의 도시’로 변했다. 시내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주민들은 언제 어디서 유탄이 날아들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전기와 통신이 두절
돼 외부세계와의 연락은 꿈도 꾸지 못한다. 식량과 의약품도 바닥난 지 오래다. 구호단체들은 최소한의 인도
주의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된 가지지구는 죽음의 공포와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AFP통신과 BBC,
CNN 등이 전한다. 그런데 가자지구의 폭격을 이스라엘인들이 쌍안경을 들고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폭탄
이 떨어지면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이야기다.
유태인, 그들이 믿는 것은 돈이며, 그들이 신봉하는 것은 손에 든 무기이며, 그들이 존경하는 나라는 미
국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믿는 돈도, 미국도, 여호와도, 강력한 무기, 그 어느 것도 그들의 불안
을 해소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포탄으로 팔레스타인들이 사는 땅을 초토화시킨다고 하여도 여전히
팔레스타인들은 이스라엘 옆에 살고 있다.

오히려 작금 유태인들이 뿌려놓은 증오의 씨앗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유태인들의 포탄에 부모형제를
잃은 팔레스타인들의 어린 전사들은 인간폭탄이 되어 유태인을 향한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을 준비하고 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에만 눈 먼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돈으로 산 외교문서 한 장으로 2000 동안 그 땅
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들을 내쫓고 나라를 세운 것도 감지덕지일진대, 오히려 이젠 원주인의 보따리까
지 강탈하고자 하는 유태인.
그러한 상황이라면 이 세상 그 어느 민족이 순순히 자신들의 땅을 내놓을까? 처음부터 팔레스타인들의
저항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 정당한 저항 앞에 유태인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기실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은 종교만 다를 뿐 한 종족인 것이다.

그런데도 유태인들은 그들이 나치에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팔레스타인들을 유린하고 있다. 병
원이고 학교를 가리지 않고 폭탄을 퍼붓고 있다. 한편의 비극을 넘어 희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중동 한켠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만은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 안에는 팔
레스타인과 유태인이 겪고 있는 이 근본적인 증오와 갈등이 없을까? 혹여 우리 남북 또한 중동의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묵은 지역감정은? 또한 강남과 강북으로 대변되고 있
는 빈익빈 부익부의 계층 갈등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또한 중동의 비극을 보면서도 유대인의 잘못을 따라가고 있는 형국이
다. 정권을 잡은 자들은 미국을 신봉하여 영어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시계
는 7-8십년대의 냉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강남의 일천한 식견의 졸부들이 오로지 제 자식을
위해 이상한 교육감을 뽑은 것처럼. 그들은 끝없이 경쟁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국정의 철학에도 진정한 자유와 공존은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총을 외치며 따라오라고
주먹질을 하고 있다. 함께 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소치인 것이다.
장애인이면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장애인들이 바라는 세상이다. 그
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조병화 시인의 공존의 이유는 시사하는 의미가 남다르다.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 그때 헤어집시다 /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 않도록 합시다 /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날이 오면 / 가벼운 눈웃음과 /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존의 진정한 법칙이 아닐까?
아직도 겨울은 길고 멀다. 손바닥을 부비며 생각하는 것, 그것은 진정 우리의 동족이 우리의 북
쪽에 살고 있고, 우리의 동족이 이 겨울 우리와 함께 살지 못하고 우리 곁에서 떠나고 있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니 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은 경이
요, 경외로 가득 차 있다.

100년도 되지 않는 인생,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그 어떤 누구도 이 짧고도 기막힌 여
행길의 도반이지 않을 수 없다. 지구라는 우주선에 탄 그 누구도 낙오되어서는 안 된다.
단 한명의 중생이 남을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은 곧 부처님의 정수리 말
씀이다.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생활고를 못이긴 일가족이 한꺼번에 목숨을 버리는 데도 반들반
들한 모습으로 경제를 외치며, 영어를 외치는 지도자의 모습은 정말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세계 몇 위의 경제대국을 자랑 삼으며 외교에 있어서는 연일 계속되는 폭격으로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는 가자지구 사람들을 외면하는 지도자, 그것이 미국의 사냥개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그가 아무리
서툰 영어로 미국과 함께 해도 미국은 우리를 유럽이나, 일본처럼 대접하지 않는다. 처음 마치
철없는 카우보이처럼 쌍권총을 차고 나타나 자신만이 세상의 의인인양 동작을 하던 떠나가는
부시의 뒷모습을 보면서 왜 자꾸 이 나라 지도자가 생각나는 것일까? 부시가 근원적으로 자신의
정치여정을 실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함께 공존하는 세상의 순연한 이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
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못난 부시의 전철을 되밟
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한 사람에게 부처님의 단 한 마디를 전한다.
어리석은 중생이여, 함께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