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특집 공존의 삶1
    특집 공존의 삶2
    특집 공존의 삶3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절문밖 충경소리
    문화 트렌드
    금강계단
    연중기획
    지상법문
    불화의 세계
    차 이야기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과월호보기

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참 자유 노래할 수 있어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지난해 연말 통도사 주지소임을 맡고 두 번째 53일간의 화엄경산림법회를 회향했습니다. 회향법회가 열리던 날 수만 명에 불자들의 동참으로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그래서인지 산림법회를 마치고 나서는 특별한 감회와 함께 화엄경산림법회와의 인연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내가 지금의 화엄경산림법회를 열게 된 첫 인연은 30여 년 전 오대산 월정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탄허스님을 모시고 화엄경 공부를 하겠다고 전국에서 스님이 모였는데, 53명을 모아서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녔던 것처럼 53명이 본방대중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 후 구룡사에서 화엄경산림법회를 3년간 백고좌로 열었으며 또 2007년과 2008년 통도사에서 53일간 53명의 선지식을 청해서 화엄학으로 연화장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화엄학을 정리해 가고 있는 터에, 화엄경법회를 회향하면서 문수보살이 선재동자를 크게 칭찬하는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재여, 그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고, 또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보살의 행을 물으며 보살의 도를 닦으려 하는구나. 선재동자여, 선지식들을 찾아 법을 구하고 공양함은 온갖 지혜를 구족하는 첫 번째 인연이니라. 그러므로 이 일에는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라.」
수많은 대중과 함께 500명의 동남동녀 속에 선재동자도 함께 있었지만, 문수보살은 선재동자가 수많은 과거 생으로부터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선근을 많이 심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그렇게 수없는 세월에 걸쳐 부처님께 공양을 하면서 선근을 쌓았을 뿐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믿음 또한 굳건했기 때문에 이해력이 크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또 여러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 하고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들이 허물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보살이 도를 깨끗이 하며는 온갖 지혜를 구하며 부처님 법의 그릇을 이루었고 마음이 깨끗하기가 허공과 같아서 아뇩다라샴막삼보리에 회향코자 하는데 장애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수없는 사람 가운데의 선재라고 하는 동자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문수보살은 단박에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식이 누구입니까?
현재의 우리 모습에서 보면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즉 남편이 선지식이요, 아내가 선지식이며, 부모는 자식이, 자식은 부모님이,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선지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테두리 안에 있는 모든 분들을 이해하게 되면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살아있는 선지식을 내 가정에서부터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 일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정주부가 남편에 대한 내조자로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되는 다반사의 일, 즉 밥하고 설거지하는 것에 치를 떨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재동자가 선지식인 문수보살에게 질문하듯이 우리도 물어야 합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혜를 구족하는 데는 선지식이 아주 중요한데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데서 우리가 절대 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고달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집에 살아있는 선지식과 같이 살면서 거기서 수행하고 정진하고 공부하고 불자이기를 서원하고 살아가면서 고달픈 생각을 내서야 되겠습니까? 남편에게 잘해주고 부인에게 잘해주고 자식에게 잘해주고 부모에게 잘하라는 그 관계가 무엇입니까?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인데 하물며 부모형제 처자권속으로 만난 그 지중한 인연을 고달프다고 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에게 보살의 행에 대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이여,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보살은 어떻게 보살의 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의 행을 닦으며, 보살의 행에 나아가며, 보살의 행을 행하며, 보살의 행을 깨끗이 하며, 보살의 행에 들어가며, 보살의 행을 성취하며, 보살의 행을 따라 배우고 생각하고 넓히고 보현행원을 원만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문수보살이 어린동자였던 선재를 단박에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재동자를 칭찬하며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훌륭하다. 선재동자여, 그대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고 보살의 행을 구하는구나. 선재동자여, 어떤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대는 마음을 내고 또 보살의 행을 구하는구나. 선재동자여, 온갖 지혜를 성취하려거든, 반듯이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선재동자여, 선지식을 찾는 일에 고달프고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고, 선지식을 보고는 만족한 마음을 내지 말고, 선지식의 가르치는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선지식의 교묘한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초발심을 내기가 힘든 일인데 선재동자는 이미 그 마음을 내었고, 보리심을 내는 일 또한 어려운 일인데 그 마음을 내었으며, 보살의 행을 구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데 지금 출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지혜를 성취하고자 하거든 결정코 선지식을 만나야한다고 일러준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또한 지혜를 이루고자하거든 결정코 선지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지식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좋아야하고 함께하는 도반들이 좋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어울림을 가지고 있는 불자와 불자들의 만남이 소중한 것입니다. 거기에다 함께 동사섭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절에 와서는 절에서의 어울림이 그렇고 집에 와서는 내 가정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훌륭한 도량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값지고 소중한 공력을 지닌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선지식을 찾는 일에 고달프다는 생각과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고 선지식을 보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선지식의 가르치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선지식의 교묘한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고 문수보살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식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일념까지 진실한 생각 속에 있으니 참으로 장하다’고 거듭 칭찬을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최후의 일념까지 진실한 생각 속에 있으니 어린 선재가 얼마나 장하겠습니까?
선근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과의 인연이 멀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석양의 노을과 같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진리인데 진리를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걸 보면 모범으로 삼고 그릇된 것을 보면 경계로 삼아서 그 어떤 누구라도 다 내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안목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선근이 있어야 하고 지혜를 성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이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그 모습을 우리가 비춰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불자가 됐다는 것은 이미 복인(福人)입니다. 법회가 있는 날 절에 와서 장시간을 절에 머물 수 있고 함께 기도하고 법문 듣는 것만으로도 복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수승한 인연을 발현시키고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어울림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보살, 보살’ 하는데 그 보살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선근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착한 마음과 지혜로운 경계를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또 모든 번뇌의 뜨거움을 없애는 것이 지계바라밀이고,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해치지 않는 것이 인욕바라밀이며, 부지런히 선법을 구하되 만족할 줄 모르는 삶이 정진바라밀이고, 온갖 지혜의 길이 항상 앞에 나타나 잠깐도 산란하지 않는 것이 선정바라밀이며, 모든 법의 생멸이 없는 것을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이고, 한량이 없는 지혜를 내는 것이 방편바라밀이며, 가장 으뜸가는 뛰어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서원바라밀이고, 모든 이단과 마구니가 깨뜨릴 수 없는 것이 힘(力)바라밀이며, 모든 것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지혜바라밀입니다.

진정한 보시는 번뇌를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지계, 규범이라는 것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나타난 경계에 대해서 무상한 마음을 내는 것이 진정한 인욕입니다.
또 정진이라는 것은 집착하는 모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정진이요, 선정이라는 것은 집착에서 머물 마음이 없는 것이 선정입니다. 변별력은 지혜를 통해 갖게 되지만 분별력을 일으키지 않는 것, 시비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을 우리는 진정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라는 것도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하나를 버릴 줄 알면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고, 버릴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생활불교인이라면 나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나를 볼 수 없음을, 내 스스로가 나를 묶고 집착하고 치우치고 얽매이어서는 절대로 참자유를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선재동자의 구법정신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나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유욕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참 자유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한 가정이 이뤄지는 것이고 회향할 수 있는 보현행원이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불자는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한 가정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선지식들에게 고달픈 마음 일으키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조건 없이 잘 대해 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연이 있어서 맺어진 구성원들끼리 먼저 편안함을 줄 수 있고 넉넉함을 줄 수 있는 그런 불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