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시인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그에게는 비 극과 희극이 공존하고 있다. 신화라는 이름으로 잔인함과 즐거움, 도취와 쾌락, 속 박과 해방이 한 지붕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 다. 디오니소스 축제도 바로 술의 그런 양면
성을 즐기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행사다. 풍작과 다산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 는 그 광란의 축제는 다음날 아침이면 인간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몰아간다. 그래서 부처님 은 일찍이 오계라는 이름으로 술 마시는 것을 경계했다.
가중된 경기 침체로 우리 국민들의 삶이 곤 궁해지면서 지난해 그 술에 의지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현저하게 늘었다. 국민건강보 험공단에 의하면 2006년 14만 7886명이던 알코올 의존증 진료 환자가 2007년에는 17만 1308명, 지난해에는 18만2000명으로 증가 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본 격화한 지난해 9~12월 사이엔 알코올 의존 증 진료 환자가 6만4215명으로, 2007년 같 은 기간 5만9785명 보다 7.4%나 늘었다.
씁쓸한 그 소식을 접하면서, 벌써부터 한 해의 피곤이 몰려들기 시작한 마음의 빈 공간 을 찾기 위해 얼마 전 경북 문경 뇌정산 기슭 에 있는 토굴에 다녀왔다. 춥고 무거운 시절 에도 대자연의 원형질은 맑고 순결했다. 정한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핀 눈꽃이 퍽 아름다웠 다. 싸리울처럼 일렬횡대로 쭉 늘어선 눈꽃 능선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 능선 을 쪼며 날아다니는 새의 날갯짓 또한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겨울 산에는 사바세상의 속(俗)이 없었다.
멧새들의 순백한 부르짖음을 따라 뚜벅뚜벅 눈꽃 능선을 올랐다. 발밑의 마른 풀잎과 나 뭇잎, 그리고 이따금 발부리에 차이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내 기갈의 발길을 느릿느릿 붙잡았다. 바짓가랑이를 자꾸 붙드는 그것들 을 보면서 나는 문득 백전백패하고 살아온 나 의 세상살이를 생각해보았다.
<중부경전(中部經典)> 「일야현자경(一夜賢者經)」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석가모니부처님 의 게송이 나온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마라
한번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졌고
도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어떤 것이건 지금 해야 할 일을
성실하고 자세히 살피어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실행하라
오늘 이 순간을 간절히 살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진실로 죽음의 군대와 싸움이 없는 날 없거늘
밤낮으로 게으름을 모르고
이같이 부지런히 정진하는 사람
그를 일러 일야현자
마음이 고요한 성자라 한다
지나가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충실히 살고 있을때
그 안색은 생기에 넘쳐 맑아진다
오지 않은 것을 탐내어 구하고
지나간 과거사를 슬퍼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로 인해
꺾인 갈대처럼속절없이 시든다
지나간 과거에도 묶이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에 도 흔들리지 말며 오로지 현재 주어진 일에 충실 하라는 부처님 말씀을 되새기며, 나는 지금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당기는 저 마른 풀잎과 나뭇 잎과 돌멩이들의 숨결을 느껴보았다. 또 지금 나를 눈꽃 능선으로 불러낸 멧새들의 말소리도 들어보 았다. 아무리 춥고 무거워도 항상 맑고 따스한 영 혼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유지하고 사는 저들의 우 주를 생각해보았다.
임제선사는‘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 했다.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 는 그곳에 바로 진리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저 멧 새들과 마른 풀잎과 나뭇잎과 돌멩이들은 지금 자 신들이 앉고 눕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인 이 되어 자신들의 역할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 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 워도 사유의 맑은 정신으로 세상과의‘소통’ 과‘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
5부 능선쯤 올랐을 때 눈 덮인 묵정밭에서 배추 한 포기가 살포시 어깨를 내놓고 있었다.
지난 가을 미처 김장 김치가 되어 사람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데에 버려진 배추 였다. 그 때 나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만약 저 배추 포기가 김치가 되어 지금 내 몸속에 들어 와 있다면? 내 생명이 되어 있다면? 내 우주가 되어 있다면?
그렇다. 저 배추 포기가 김치가 되어 지금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다면 저 배추는 이미 내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되고 우주가 되었을 터다.
그리고 그 살과 피와 뼈가 자라 내 마음을 이루 고 사유를 일구고 생명을 일구었을 터다.
이번에는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지금 여기 토굴에서 저 배추를 먹은 나는 이제 소변과 대 변을 배설하겠지. 그러면 내가 배설한 소변과 대변은 거름이 될 테고, 언젠가는 그 거름이 저 묵정밭 배추의 밥이 되고 실핏줄이 되고 잎 사귀가 되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내가 저 배추의 우주가 되고 생명이 되었다. 배추가 내 가 되고, 내가 배추가 되었다.
아무리 힘들고 기갈난 세상이라도 결국 우 리는 너와 나라는 소통과 관계 속에서 우리들 의 죽살이를 이어간다. 술은 결코 현재의 이 소통과 관계를, 곤궁과 기갈을, 핍진과 박탈을 해결해주 못한다. 오직‘수처작주 입처개진’ 하는 마음만이 우리의 곤궁과 기갈과 핍진과 박탈을 뚫고나갈 수 있다. 그것만이 음주로 넘 어진 우리의 불순한 다반사를 행복한 다반사 로 바꾸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