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1.
지난 1월호에 필자는 『현담玄談』을 활용해서 『화엄경』 읽기로 안내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중국 당나라 말기에 활동하던 화엄종의 제4조로 추앙되는 청량 징관(738~839) 국사가 지었다. 『현담』 8책을 포함해서 총 90책으로 된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한 세트는 조선시대 징광사, 영각사, 그리고 봉은사에서 판각된 바 있다. 징광사와 영각사의 판목은 화재로 사라졌고, 현재 학인學人들 손에 돌고 있는 것은 철종 6년(1855)에 새겨 서울 강남 수도산 봉은사 판전版殿에 보관한 목판의 인쇄본이다.
『현담』을 볼 것 같으면, 제1책은 각종 서문序文 등으로 구성된다. 제2책, 즉 지地 자로 표기된 권의 소위 ‘교기인연(敎起因緣 가르침이 일어나게 된 인과 연)’이란 과목에서, 청량 국사는 『화엄경』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이유를 ‘인因’과 ‘연緣’의 측면으로 각 10방면에 ‘포인트’를 맞추어 분석하고 있다.
수많은 불경들이 세상에 문자로 전해지고 있는데, 『화엄경』은 무슨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일까? 『화엄경』이 세상에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설명하기 위해 청량 국사는 ‘교기인연’이라는 과목을 설정하여 전문가로서 의견을 낸 것이다. 이하에서 독자들도 “『화엄경』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직간접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청량 국사의 아래 대답을 읽으시길 바란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먼저, ‘인(因 직접 원인)’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① ‘일불승一佛乘의 오묘한 진리(玄門)’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본래 있기 때문에, 진리 체험자는 누구나 똑같이 진리를 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33품 「불부사의법품」에 그 증거가 나온다. 『화엄경』의 출현 이유는 한 마디로 하면 ‘온 중생을 부처 만들기 위한 오묘한 프로젝트’ 때문이다.
 
②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를 되갚으려는 때문이다. 과보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과거 수행의 단계에서 세운 ‘소망의 힘’ 때문이고, 둘째는 과거에 ‘수행해서 얻은 힘’ 때문이다. 전자의 사례는 제2품 「여래현상품」과 제23품 「도솔천궁게찬품」에, 후자의 사례는 제1품 「세주묘엄품」에 나온다.

③ 청중들의 근기에 맞추어주려는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생들의 근기가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고, 끝내는 일체의 중생은 깨침의 종자가 있음을 선포한다.

④ 불교의 다양한 가르침에는 근본이 있는데, 『화엄경』의 가르침이 근본임을 밝히려는 때문이다. 비유하면 땅 깊은 곳에 지하수가 흐르기 때문에 누구나 땅을 파면 인연 따라 물을 구할 수 있듯이, 화엄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일체의 교법이 성립 가능해진다. 제37품 「여래출현품」에 이런 이야기 나온다.

⑤ 수행의 결과가 얼마나 좋은지를 보여주려는 때문이다. 제4품 「세계성취품」, 제2품 「여래현상품」 등에 그 예가 나온다. 앞의 품에서는 수행을 성취한 사람이 사는 환경의 좋음을, 뒷 품에서는 수행을 성취한 당사자의 빼어난 몸매를 설명한다.
 
⑥ 수행에 따르는 지위 단계를 보여주려는 때문이다. 지위를 설하는 방식에는 항포문行布門과 원융문圓融門이 있는데, 전자는 수행에 따라 결과를 순차적으로 늘어놓고(行列) 나누어 펼쳐(分布) 설명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하나와 일체가, 또 순간과 영원이, 서로 관계하는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의 변증 방식이다. 전자는 제2회에서 믿음 내기(信)를 밝히고, 제3회에서 믿음 굳혀가기(住)를 밝히고, 제4회에서 수행의 양상(行)을 밝히고, 제5회에서 공덕의 회향廻向을 밝히고, 제6회에서 수행의 지위(地)를 밝히고, 제7회에서 ‘등각’과 ‘묘각’을 밝힌다. 후자 즉 원융문은 뒹구는 한 잎의 낙엽을 보고 온 세상에 가을 왔음을 알아차리고, 한 모금 바닷물로 사해바닷물이 짠 줄을 단박에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⑦ 몸소 수행 실천 해야만 삶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때문이다. 군자가 직위가 없는 것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수양이 모자라는 것을 근심한다는 『논어』의 뜻도 같다. 수행 실천의 방법은 위에서 말한 ‘항포’의 방식도 ‘원융’의 방식도 있다. 이런 사례는 제36품 「보현행품」에 잘 보인다.

⑧ 진리를 보여주려는 때문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사사무애事事無碍하는 법’이 진리다. ‘사사무애’란 무엇인가? 이 물음의 대답은 ‘10현문十玄門’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세하게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지면의 균형상 간단하게 설명하면, ‘한마음(一心)’의 바탕 위에 펼쳐지는 일체의 현상들과, 또 각 현상들끼리의 관계를 연기緣起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화엄종 초조初祖로 존경받는 두순 법사의 『화엄법계관문』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 책에는 화엄종 제3조인 현수 법장, 제4조인 청량 징관, 제5조인 규봉 종밀 등 위대한 학승들이 각각 모두 주석서를 썼을 정도로 불교 관행(觀行 관찰 수행)의 핵심이다.

⑨ 중생들의 본성 속에 『화엄경』의 진리 자체가 간직되었음을 밝히려는 때문이다. 저 유명한 제37품 「여래출현품」에 잘 묘사된다. 금이나 옥이 자체에 없으면 아무리 제련하고 쪼아대도 절대로 보배 그릇이 될 수 없다. 그렇듯이 중생 자체에 부처 될 본래의 성질이 없다면 어떤 수행도 소용없다.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분석해 주고, 한편으로는 실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화엄경』을 설했다.

⑩ 듣는 대중들에게 이익을 주려고 『화엄경』을 설했다. 그 대중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통한다.

3.
다음으로, ‘연(緣 간접 원인)’의 측면에서 살피보자.

① 시간과 ② 공간이 있기 때문에 『화엄경』이 설해진다. ‘시간’과 ‘공간’의 있음(形式)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하고 있다. 현대의 철학과 과학의 지식을 동원해야만 이 대목에 관한 『화엄경』 내용이 이해된다. ‘시간’-‘공간’은 상호 관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위에 다시 가장 짧은 단위인 ‘찰라’와 가장 긴 단위인 ‘겁’을 사용하여 시간을 설명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화엄경』을 읽어야 한다. ‘공간’에도 가장 좁은 ‘티끌(塵)’과 가장 넓은 ‘국토(刹)’ 단위를 활용하여 그들이 서로 관계하고 있음을 『화엄경』에서 설한다. 그 관계란 ‘상입相入’과 ‘상즉相卽’이다.

③ 교주(說主)가 계시기 때문에 『화엄경』이 세상에 나왔다. 교주의 정체는 크게 두 양상을 띠고 있는데, 하나는 ‘일체의 인연을 초월하는 절대 진리의 몸(法身)’이고, 다른 하나는 ‘인연에 상응해서 나타나는 몸(應身)’이다. 응신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수행자 당사자의 수행 인연에 상응해서 나투시는 몸(報身)’이고, 다른 하나는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부처님 쪽의 인연에 상응해서 나투시는 몸(化身)’이다. 『화엄경』의 설주는 삼불원융三佛圓融이요 십신무애十身無碍이시다. 이와 함께 ⑨ ‘설법을 간청하는 대중(請者)’도 『화엄경』이 세상에 나오도록 거든 간접 인연을 지었다.
 
④ 삼매에 들기 때문에 『화엄경』이 들린다. 부처는 항상 마음이 선정(三昧)에 들어있지만, 듣는 중생들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중생이 바른 명상에 들어야만 부처의 이야기가 들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보살의 ⑩ 가피도 필요하다. ‘삼매’와 ‘가피’라는 간접 원인 때문에서 『화엄경』이 설해질 수 있었다. 이와 함께 ⑤ 설법을 할 때에 황홀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염두에 두면서 『화엄경』을 읽으면 좋다. 때로는 찬란한 빛을 내기도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땅이 진동하기도 하고, 꽃비를 내리기도 하고, 향이나 구름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이다.

⑥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說者)이 있기 때문에 『화엄경』이 설해진다. 주로 보살, 성문, 중생, 그리고 ‘중생들이 사는 주변 환경(器世間)’이 이야기를 한다. 더러 부처도 한다.

⑦ 청중이 있기 때문에 『화엄경』이 설해진다. 크게 10종으로 청중을 분류할 수 있으니, 영향중(큰 보살과 타방의 여러 부처님), 상수중(보현이나 문수보살처럼 항상 따라 다니는 대중), 수호중(불법을 수호하는 신들과 그 대표인 신장), 엄회중(도량신처럼 설법 장소를 꾸미는 대중), 공양중(게송이나 향 등 다과를 올리는 대중), 발기중(질문을 제기하는 대중), 당기중(법을 듣고 깨침을 얻는 대중), 표법중(진리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대중), 증법중(설법의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하는 대중), 현법중(같은 자리에서 법을 듣지만 듣지 못하는 대중. 예를 들면 성문승).

⑧ 끝으로 어떤 ‘공덕의 바탕(德本)’이 있었기 때문에 『화엄경』을 들을 수 있다. 크게 두 공덕의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공덕의 원인 때문에 『화엄경』이 출현한 것이다. 청량 국사는 이렇게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