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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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씨앗 전략

 


홍성범
숲해설가


나무는 신비스러운 존재다. 한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에는 화사한 단풍으로 마음을 설레게 한다. 종에 따라 다양한 과일이나 열매를 맺어 동물의 입을 즐겁게 한다. 무리를 지어 마을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자신의 온 몸을 내어주어 각종 건축자재가 되기도 한다.
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오래 사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막강한 존재에 대해 많이 알지 못 한다. 그저 상쾌한 공기를 선사하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그 이상은 더 알고자 하지 않는다.
숲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동물과 달리 다른 곳으로 스스로 이동하지 못하고 한 자리에서 나고 그 자리에서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나무는 어떻게 자신의 자손을 퍼트려 숲을 번성하게 할 수 있을까.
나무의 생존 전략, 씨앗을 통한 나무의 전략을 알아보자.
나무가 씨앗을 흙으로부터 가져오는 전략은 다양하다, 많은 나무들은 바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씨앗을 이동시킨다. 씨앗을 멀리 이동시키기 위해 다양한 구조를 개발하기도 한다. 에너지 저장소이자 종족 번식을 위한 씨앗이 바람에 의해 멀리 잘 날아가려면 최대한 무게를 줄여 가벼워야 한다. 포플러는 씨눈의 무게를 1밀리그램 미만으로 줄인다. 포플러의 씨앗에는 고슴도치 가시처럼 뾰족하게 선 솜털이 달려서 약한 바람에도 잘 날아간다. 폭풍이 몰아칠 때 포플러 씨앗은 100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왔던 숲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정착하여 새로운 공간을 쉽게 개척한다.
무게를 가볍게 하는 씨앗 구조에는 단점도 있다. 씨앗에는 지방 혹은 오일 형태의 저장 물질이 거의 없어서 새싹은 스스로 에너지를 조절해야 계속 성장할 수 있다. 나무는 다른 종의 나무와 경쟁할 필요가 없고 심지어 식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정착하고 싶어 한다. 이런 곳에서 작은 싹을 틔우고 자라 성목이 되고자 한다.
숲을 좋아하는 수종들은 자손에게 양식을 조금만 내어주고 여행을 떠나보낸다. 어스름이 짙어지고 햇빛이 가물가물해지면 나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한줄기 햇빛이 땅에 닿는 순간 나무들의 경쟁이 시작된다. 저장된 에너지가 충분해야 뿌리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고 잎이 형성된다. 그런데 영양분이 많은 씨앗은 무거워서 멀리 날아 갈 수 없다.
나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 끝에 탄생한 것이 회전자 구조다. 회전자 구조에는 헬리콥터처럼 작은 동력장치가 달려서 무거운 씨앗도 멀리까지 실어 나를 수 있다. 이번 가을엔 단풍나무의 화려한 잎만 보지 말고 씨앗에 달린 날개도 살펴보도록 하자.
더 무거운 씨앗과 동력장치가 없는 씨앗은 동물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야생 환경에서 농축된 식량을 먹고 사는 어치나 청설모 같은 동물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동물들은 겨울에 눈이 내려 식량이 떨어질 때를 대비하여 한 마리당 수백 개 심지어 수천 개의 먹이를 숨겨 놓는다. 포유동물은 수백 미터 인근 지역에 숨겨 놓는 반면 조류는 수 킬로미터 먼 지역에도 씨앗을 숨겨 놓는다.
청설모는 자신이 숨겨놓은 장소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설모는 1만 개가 넘는 식량을 숨겨놓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청설모 혼자서 많은 식량을 다 처리할 수는 없다, 이 많은 씨앗을 다 먹으면 청설모는 과체중이 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남는 씨앗이 생기게 되는 데 이들이 봄에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나무와 동물의 훌륭한 공존이다.
동물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나무도 정해져 있다. 그래서 동물들은 자신이 주식으로 먹는 씨앗을 퍼트리며 나무를 돌본다. 이것은 동물 자신의 후손이 먹고 사는 데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나무의 계획에 없던 동물도 있다. 야생 멧돼지가 대표적이다. 멧돼지는 추운 겨울을 나려면 몸속에 두꺼운 지방층이 있어야 해서 매년 가을 열매를 찾으려고 나무 밑을 파헤치며 다닌다. 도토리와 너도밤나무가 열배가 많이 열린 해에는 멧돼지들이 목적을 달성하고도 남는다. 과거에는 가을이면 가축용 돼지에게 열매를 먹여 사육했다.
멧돼지가 숲에 해로운 동물이라기보다는 이로운 동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멧돼지는 흙에 떨어진 야생 열매를 찾으러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남은 열매를 일부 묻어 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수천 개 어린 새싹의 눈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는 틀린 주장이다. 멧돼지는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도토리나 너도밤나무 열매를 거의 다 찾아내 먹어 치운다. 최근 멧돼지 개체 수가 급증하여 가을이면 숲의 토양이 완전 초토화되곤 한다. 어미나무는 이듬해에 새싹이 나길 기다릴 테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멧돼지 개체 수 급증은 기후변화, 정확히는 따뜻한 겨울 때문이라 한다. 또한 참나무와 너도밤나무가 환경변화에 대한 스트레스로 종족을 보호 보존하고자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요인으로 꼽힌다.
한편 우리가 야생 열매에 흥미를 갖게 된 이유와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많은 나무가 씨앗을 일부러 매력적인 열매껍질에 포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맛있게 먹으라는 의도도 있지만 종족 번식을 위한 나무의 숨겨진 전략이 있다.
첫 번째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으로 열매껍질로 씨앗을 포장하여 손상되지 않은 상태의 씨앗을 동물의 배설물로 배출하게 하는 것이다. 마가목 열매는 가을이면 붉은 열매로 손님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이 씨앗들은 손님인 새들의 먹이가 되어 멀리 이동한 후 새들의 장을 거쳐 배설된다. 나무는 새들과의 공존을 통해 자신의 종족을 멀리 그리고 안전하게 전파하는데 성공한다.
두 번째는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과실수 재배는 수백만 년이 넘는 긴 역사동안 인류와 함께 했다. 과실수는 야생종의 단점을 보완하여 인간에 맞춰 진화해왔다. 또한 서로 도울 뿐만 아니라 다른 종의 나무들을 보호해준다. 인류가 과실수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나무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환경 적응력을 잘 파악하고 활용한 결과이다.
침엽수든 활엽수든 상관없이 우리 주변의 나무들은 가을이면 여가시간을 준비하고 겨울잠을 준비한다. 나무들은 거추장스러운 나뭇잎을 벗어 던지고 이듬해 봄까지 광합성을 중단한다. 나무의 생존전략이다.
나무는 서리의 피해를 막기 위해 목재와 수피의 수분 함량도 최대한 줄여놓는다. 이른 봄의 수피는 극도로 민감하다. 습기 찬 변재와 눅눅해진 내피층 탓에 부름켜의 응집력이 생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특히 수피 손상이 잦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비활동기인 겨울에는 모든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듬해 봄이 되어야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
나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이동할 수는 없는 나무는 그들만의 생존과 종족 보존의 전략을 수립한다.
나무는 다가오는 혹독한 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해 봄을 맞이하지 못할 것을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그 두려움이 숲의 요소들을 최대한 활용한 공존의 방식일 것이다. 인간도 주변의 현실적 요소들을 인정하고 공존의 지혜를 모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