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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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잡초이고 해충인가

 


정성운
텃밭농부


며칠 새 따스한 기운이 돌았다. 햇살에 눈이 부셨고 바람은 순했다. 겨울이 다 지나간 듯했지만 이내 한기와 함께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래도 겨울은 계절의 끝자락을 맴돌고 있다. 머지않은 데에서 봄이 오고 있을 것이다. 2월은 목을 빼 굽어진 길의 이어짐을 가늠해보는 것처럼 기다리는 시기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의 가장 큰 감각은 콩닥거리는 설레임이다. 2월은 설레어서 좋다.
지난 한 해 동안 몇 지인들과 더불어 ‘자연의 권리’라는 주제를 쫓는 책읽기 모임을 했다. 한 달에 두 번 모였으니 횟수로는 스무 번이 넘었고, 읽은 책은 10권쯤 되었다. 몇 권 소개하자면, 『자연의 권리』 『지구를 위한 변론』 『황혼의 사색』 『지구를 위한 법학』 『선의 생태학적 인식』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 등이다.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벗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재미를 주었다. 근황을 나누고 밥도 함께 먹었다. ‘자연에도 권리가 있다’는 낯선 주제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인간에게 권리가 있듯이 자연, 즉 인간 외의 세상 모든 만물에도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 사람됨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권리는 인간의 보호를 받을 권리, 살 권리, 번식할 권리, 자유로워질 권리, 인간에게 감사받을 권리로 요약된다. 위에 소개한 책 중에 『지구를 위한 법학』이 있는데, 이 책은 실정법의 차원을 지구의 생명시스템에 맞추어가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자연에도 권리가 있다


자연의 권리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이 지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지구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미생물, 균류, 암석, 물, 바람, 햇빛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이 어우러져 서로를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도 자연의 권리라는 주제는 낯설다. 그 이유는 인간 중심의 생각에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익숙하기도 했는데, 불교의 가르침에는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세상의 모든 생명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가르침이다. 『열반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선종에서는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을 주창했다. 무정물인 풀과 나무까지도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무정성불론無情成佛論이라고도 한다. 이런 용어의 자세한 뜻은 모를지언정 어느 스님의 법문 중에서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생태학은 50여 년 전쯤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는데, 기후변화가 위기의 상황이 된 지금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기후 위기는 지구가 지닌 생태의 한계를 넘어선 결과 발생한 것이다. 요한 록스트룀과 마티아스 클룸은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에서 기후 변화와 질소에 위한 오염, 생물 다양성 손실률이 안전 한계선을 넘었다고 경고했다.
지구는 생태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생태계이다. 동양에서는 지수화풍의 조화롭게 작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터인 지구가 유지된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런 까닭에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지구)의 관계성을 중시했다. 어느 한 곳에서 균형이 어긋나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다. 불교는 이미 2500년 전에 이런 가르침을 펼쳤다. 불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탁월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가르침을 몇 개의 용어로 요약하자면, 연기, 중도, 무아이다. 세상은 상의상존하는 연기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러므로 극단의 선택이 아니라 인연들 사이에 일어나는 간섭과 영향을 살펴야 한다. 모든 주체는 관계들 속에서 생겨서 유지하다가 사라짐을 거듭한다. 생태학의 근본 토대가 그것인데, 이는 정확히 불교의 가르침에 닿아 있다.
나는 자연에도 권리가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그런 움직임을 지지한다. 그런데 고민이 뒤따른다. 조그만 텃밭농사에서도 자연의 권리와 부딪히는 일이 발생한다. 농사는 인간을 먹여 유지케 하는 일이다. 사실 농사는 살리는 것과 함께 죽이는 일이다. 과실이 아니거나 과실의 결실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쳐내지 않을 수 없다. 풀들은 잡초로 규정되며, 벌레는 해충이 된다. 사과를 쪼아먹는 새는 해조이며, 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는 병원균으로 불린다. 풀과 벌레와 새들과 바이러스들도 생명이며, 그들도 자기를 보전하고 후손을 낳아 퍼뜨리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을 해롭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도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생태계에서 인간은 상위 포식자에 속한다. 인간을 잡아먹는 생명체는 거의 제압되었다. 한때는 인간을 공격하는 맹수가 맹위를 떨쳤으나, 인간은 그들을 이겨냈다. 체구도 작고, 근력도 모자랐고, 빠르기에서도 뒤졌지만 인간은 도구를 만들 줄 알았고, 그들의 습성을 파악해 약점을 알아냈다. 인간들의 지혜가 포식-피식의 관계를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바이러스의 공격에는 취약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인간들은 바이러스의 위력을 깨달았다.
인간 외 생명, 특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생명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런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답을 내리기에는 단순치 않다.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벗들과 함께 책읽기를 하던 중 임재해 님이 쓴 『민속문화의 생태학적 인식』이라는 책을 보았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그동안에는 민속문화를 민족적·민중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생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면서 민속문화에 깃든 생태적 인식을 찾아내 보여주었다. 새로운 안목을 열어준 탁월한 저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개아지 논밭 갈아주고 지렁이도 흙을 일궈


이 책에서 충제蟲祭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남 진도 등에서 아직도 지내고 있다. 충제는 벌레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6월 초에 올린다. 벌레를 다스려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인데, 의식문 가운데 ‘剿絶滅後遺種초절멸후유종’이란 구절이 있어 깜짝 놀랐다. 풀이하면, 사람을 괴롭히는 벌레들을 박멸하되 그 종자만은 남겨달라는 것이다. 서해의 작은 섬 조도 사람들을 포함해 서남해 어부들은 조기잡이를 하면서도 “만선을 바라지만 씨고기는 남겨달라”고 노래했다는데, 농부와 어부의 마음이 이토록 같았다. 땅과 바다에 기대어 살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사냥에 나서서는 먹을 치 이상을 해치지 않는다. 죽음으로써 고기를 내어준 동물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은 물론이었다. 에스키모에게도 이런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동물의 존재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케 하고, 그러므로 그 동물이 계속 번성해야 함을 알고 있다.
내 밭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거기에 나보다 먼저 터를 잡고 살아가는 온갖 생명들의 서식처이다. 내 먹을 것 얻자고 잡초, 해충, 미물의 씨조차 말릴 수는 없다. 그것은 내 발등을 찍는 어리석은 일이다. 전남 장흥에 사는 토종씨앗 지킴이 이영동 농부는 이런 시를 지었다.


땅속 땅개아지
논밭 갈아주고
지렁이도 흙을 일궈
거름기를 보태네
큰 논배미 김매기
우렁이가 해결하고
무당벌레 야금야금
해충 잡기 선수
앞뒷산 뻐꾸기도 장단 맞춰
호미자루 가볍구나.


그렇구나. 땅개아지와 지렁이가 농사를 거드는구나. 저들은 잡초 사이에서, 미물과 더불어 살아간다. 흙을 일궈 미물을 살린다. 죽은 흙에서 어찌 생명이 자라겠는가. 설령 소출이 있다 한들 생명들의 온전한 상호작용이겠는가.
2월은 밭에 나가기 아직은 이르다. 농부들은 이즈음에 씨앗을 꺼내 말리고, 농기구를 손질한다. 어슬렁거리듯 밭에 나가 흙을 밟아보고 바람과 햇살을 살폈다. 겨우내 굳었던 몸을 슬슬 풀어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