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3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불교의 생명존엄사상 1
    불교의 생명존엄사상 2
    지상법문
    금강계단
    선지식을 찾아서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절문밖 풍경소리
    깨달음을 주는 영화
    선원탐방
    즐거움을 뿌려라
    반야샘터
    화제집중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치아건강 칼럼

과월호보기

생명, 외경, 그리고 흐름

차차석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까 나온 기사가 있다. 구제역으로 매몰된 지역의 침출수나 지하수에서 인간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탄저균 내지 바실러스균이 검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당국이 이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대책을 서두르고 있다고 하지만 마음 한켠에 묵직한 것이 자리잡고 있다. 누구를 위한 살처분인지 알 수가 없다.
한창 구제역 파동을 겪던 때의 일이지만 마음을 뭉클하게 한 기사가 있었다. 보통의 소들은 살처분 주사를 맞으면 1분이 안되어 쓰러지는데 죽음을 예감한 어떤 어미 소는 송아지에게 젖을 한 방울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4분을 버틴 뒤에 쓰러지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찢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구제역은 옛날에도 있었던가 보다. 허균은 소들을 치료하되 인간을 치료하듯이 해야 한다고 했단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 보지만 짐승을 도구가 아닌 생명 그 자체로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사고라면 저토록 많은 소나 돼지를 매몰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니 매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늘 소란스럽다. 조용한 날이 드물지 않은가 싶다. 4대강사업, 천안함 사태, 백령도 폭격, 구제역.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생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강을 정비하는 것이 무에 생명과 유관하냐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위주의 생각이다.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 생명들의 눈에 비치는 강물은 집이거나 삶의 터전이다. 터전의 박탈과 파괴는 무수한 생명의 소멸과 눈물과 통곡의 시작을 의미한다.
강은 정비해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4대강사업은 생명의 탄압이라 중지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정치나 산업 논리를 떠나 본질적인 문제의 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토록 처절한 통곡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저버렸기에 가능할 수 있다.
생태계는 복합적이고 유기적이란 차원에서 인간과 무관한 것이 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들의 통곡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울음과 눈물을 불러일으킨다. 상생과 이해의 마음이 사라졌기에 4대강의 눈물 소리는 천안함과 백령도 사태와 같은 무지막지한 일을 야기시킬 수 있다. 너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어리석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던가?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관계성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 위주의 편협한 사고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칸트가 인간의 존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정언명법을 선언한 것은 매우 위대했지만 이제와 돌이켜 본다면 그러한 인간위주의 존재론적 성찰이 4대강, 구제역, 천안함, 백령도 사건과 같은 생명경시 풍조를 배태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환경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범우주적인 존재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 중심의 서구적 가치관이 지니는 한계를 절감하고 너와 나, 인간과 자연, 자연과 우주가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현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인간도 우주 내지 자연의 일부분이란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환경윤리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극단적인 이기심과 편의주의 앞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마주 서 있을 뿐이다.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약자의 변명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고 승자는 패자를 비웃으며 전리품을 향유하면 그뿐인 세상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것이 어찌 부처가 꿈꾸는 세상이란 말인가? 이것이 어찌 예수가 기대했던 왕국이란 말인가? 진정한 大同이란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하는데서 가능해 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찌 생명의 강이 환희에 차 넘실거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생명의 강은 흘러야 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경해야 한다. 그것은 너의 일이 아니라 너와 나의 일이며,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네가 죽고 내가 살아야 하는 생명의 강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살아야 할 생명의 강이다. 너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며, 나의 죽음이 너의 죽음이란 사실은 이제 너무나 분명하다. 생명의 강을 막아서는 것은 이제 너와 내가 손잡고 방지해야 한다. 그것이 표면적으론 4대강이 되었든 아니면 구제역이나 천안함, 혹은 백령도 사건이 되었든 생명의 흐름을 막는 것은 우리들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선인들의 지혜를 살짝 엿보고 가기로 하자. 충남 계룡산의 갑사라는 절에는 우공탑이 있다. 불사를 하는데 동참했던 소가 너무 힘이 들었는지 병들어 죽었다. 스님들은 먼저 떠난 소를 위해 재를 지내고, 그가 갑사를 건립하는데 커다란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탑을 만들었다. 그것이 우공탑이다. 소를 소로 보았다면 우공탑은 존재할 수 없다. 인연을 달리해 소와 인간으로 만났지만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을 못하지만 그 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제역이 전국으로 전파되어 수많은 생명이 떨고 있다. 그들이 평화스러워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기상이변이나 환경의 변화와 함께 구제역이 찾아온다고 한다. 환절기에 노인들이 많이 떠나듯이 짐승들도 불안한 마음의 병이 구제역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 구제역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제 그들이 편안한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전국민이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평화 있으라’고 축복해야 한다. 마음에 무거운 짐 있으면 내려놓고 편안하게 쉬라고 기도해야 한다. 쉬지 않고 생명의 찬가를 불러야 한다. 그러할 때 생명의 흐름은 이어질 것이다.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 생명을 저버리는 사악한 마음들이 물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