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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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통도사 주지실 뜰 앞에는 지난해 낙동강 에서 옮겨 온 설중매(雪中梅) 한 그루가  지난겨울 그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촉수를 틔웠습니다. 오늘이 입춘(立春)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음지는 지난겨울에 얼고 쌓였던 얼음과 눈이 녹지 않고 있는데, 설중매는 여전히 봄소식을 전하려고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일본 속담에 󰡐감나무 옮겨 심는 사람, 벚꽃나무 잘라 주는 사람, 매화나무 그냥 키우는 사람은 바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화는 가지를 잘라줘야 건실하고 멋있고 여백의 미(美)도 있습니다. 그런데 벚꽃은 가지를 자르면 안 됩니다. 벚꽃나무가 썩었다고 자르면  또 썩어 들어갑니다. 또 감나무는 옮겨 심어도 되지만, 감이 열릴만한 수령이 되었을 때 옮겨 심으면 감이 안 열립니다. 그런 감나무를 자꾸 옮겨 심어서 감을 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보입니다.


이상(理想)은 높고 힘은 넘치지만 현실(現實)은 아직 주인공 되기에는 어렸던 시절, 통도사 도량에 매화나무 가지를 정리해주곤 했는데, 자른 가지를 버리기가 아까워서 촉수만 트여 있으면 방에 꽂아두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 가지에서는 반드시 꽃이 핍니다. 그래서 저는 매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매화는 죽지 않고 촉수만 트여 있으면 시간 차이만 있을 뿐, 반드시 꽃을 피웁니다. 이처럼 매화는 기후와 환경과 풍토에 적응을 잘하는 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동백꽃, 진달래, 철쭉 등은 오늘 필까 내일 필까 망설이다가 된서리나 진눈깨비라도 맞으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망가져버리기 일수입니다.
요즘 성형수술이 유행이라던데, 내 눈에는 얼굴 뜯어고치는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게 비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눈동자가 검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컨텍트렌즈 를  서양 사람처럼 갈색으로 한데다가, 코는 오뚝하고 머리카락 또한 물을 들여서 우리나라 사람인지 서양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그 안에서 자라나온 검은 머리카락이 자기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의 색깔은 바꿀 수 있지만 눈빛은 바꿀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입의 크기는 바꿀 수 없지만 입의 모양은 미소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위적이지 않아도 사람은 심성을 잘 쓰면 인물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인간은 심성이 달라지면 인물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얼굴 뜯어고칠 생각하지 말고 정신을 치유 할있는 수행에 더 매진하였으면 합니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물을 마시려면 컵이 필요합니다. 컵을 통해서 물만 먹어야지 컵까지 같이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컵이 예쁘면 잠시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컵을 한없이 붙들고 있으면 붙들고 있는 그 손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마음까지도 컵에게 붙들려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제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이시여, 저 하늘에 사는 사람들이나 인간 세상에서 우리를 무엇이 그렇게 속박합니까? 구속합니까? 얽매이게 합니까? 집착하게 합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간탐(慳貪)과 질투(嫉妬)가 너를 붙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이 간탐과 질투 입니다. 그런데 그 간탐과 질투가 인간에게 생기는 이유는 무명(無明) 때문입니다. 무명이란 무지(無智)한 것입니다. 또 그 무명은 게으름 때문에 생기는 것이요, 게으름은 타성에 젖어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타성에 젖어 안주하는 사람은 방심(放心), 방종(放縱), 방일(放逸)하여 결국 무기력증과 불감증에 빠져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게으름은 왜 생기겠습니까? 전도몽상(顚倒夢想), 뒤바뀐 생각 때문입니다. 또 뒤바뀐 생각은 어찌하여 생기겠습니까? 의심 때문입니다. 그 의심은 또 왜 생기겠습니까?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인생을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사는 인생은 남자가 훨씬 수월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남자는 회로가 단세포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일방통행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쌍방향입니다. 생각이 한 길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삼거리에서 여성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더 많이 내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올라갈까, 내려갈까, 갈등하다 결국 다리 난간에 부딪히는 확률이 술 마신 사람과 비슷하다는 통계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의심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대개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의심이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화를 하면서 󰡐정말󰡑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정말󰡑 같은 말을 하고 󰡐정말󰡑 같은 인생을 산다면 굳이 󰡐정말󰡑이라는 말을 다시 써야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요즘 극단 〈신시〉가 성남에서 뮤지컬 「아이다」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인데, 결코 슬프지 않은 사랑이야기입니다. 인과가 있고 윤회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교구본사 주지 회의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총무원장스님의  5대 결사 결의를 전폭적으로 지지 하였습니다.
멸시를 당하든, 비난을 당하든, 폄훼를 당하든,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 나의 허물이 라는 취지의 총무원장스님 제안을 결의한 것입니다.
첫째, 수행결사. 둘째, 문화결사. 셋째, 생명결사. 넷째, 나눔 결사. 다섯째, 평화결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자비정신입니다.


어느 해 추운겨울 저녁 늦은 시각에. 택시를 타려고 서있는데, 빈 택시가 방향이 다르다며 그냥 가버린 경험을 했습니다. 승차 거부를 한 그 택시는 차 안에 염주를 걸고 있었는데, 그 염주 때문에 내 마음이 더 화가 났습니다. 그 염주를 운전기사 어머니가 걸어줬는지, 부인이 걸어 줬는지.아니면 극성스러운 종교인들 피해가려고 일부러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염주 때문에 스님인 나에게는 그 운전기사가 더 야속하게 느껴졌고 내 마음속에는 분심이 더 나드라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우리들 주변에도 나로부터 상처받고, 괴로움 당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복권을 사는 사람은 마음속에 뭐가 부족해도 부족하니까 사는 겁니다. 복권을 사서 일주일 동안 지갑에 넣고 다니면 든든한 마음이 그 복권 값은 이미 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가 수승하고 힘이 넘치며, 젊음과 건강과 생명이 온전한 사람은 그런 것 아무 필요 없습니다.


어느 시인의 “그때는 몰랐다”는 시(詩)를 읽다가, 어지간히 내 심정을 비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몰랐다. 길을 걷는다는 것과 길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가를. 사람들은 간혹 내게 묻는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사니까 정말 행복하겠다고. 정말 보람 있겠다고.얼마나 좋으냐고. 근심걱정이 없겠다고.얼추 맞는 말이다. 행복하고, 보람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길을 내면서도,나는 종종 외로워하고, 때로 분노하고, 절망한다.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중에서-
만약 이 시를 내가 썼다면 이보다 더 강하게 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자비에 의한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한다󰡑고 했을 것이고, 󰡐정말󰡑이라는 말은 안썼겠지만.때론 분노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네 어버이들은 자식들에게는 조건 없는 삶을 살려고 무단히도 애를 쓰셨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들을 가르치셨고, 사회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시대는 조건이 생겼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했으니, 너는 나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으며 자식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러한 풍조에 물들지 말고 조건 없이 살았으면 합니다.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으로 살면 조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 살면 무조건 사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는 사람이 나을지, 조건 없이 사는 사람이 나을지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에서 바라다 보이는 모습이자 각자의 판단이요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