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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심 이치로서 불법 이해할 때 지혜의 눈 뜨리라 |
    달라이 라마
   티베트 승왕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14대 달라이라마의 신년 법회(뮌람)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전법륜지 인도 사르나트에서 열렸다. 1월 12~16일 티베트 대학에서 진행된 이번 법회에는 중국 신장자치구(티베트)에서 2천여 명이 비공식적 일정으로 동참했으며, 한국과 러시아 불자를 포함한 외국인 2천여 명을 포함 총 2만여 명의 대중이 함께 했다. 이번 법회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과 까말라실라의 <선정차제>를 주제로 했다. 법회에 앞서 열린 티베트 논서 번역에 관한 세미나에서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불자들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깐규르(kangyur)와 나가르주나를 위시한 논사들의 논서에 근거한 텐규르(tengyur)의 텍스트를 순종적으로 따르고 있다. 텐규르는 티베트불교의 소중한 보물로서 보존 번역화 돼야 한다.”며 “용수(Nagarjuna), 아리아데바(Aryadeva), 아르야상가(Aryaasanga), 담마끼르띠(Dharmakirti), 찬드라끼르띠(Candrakirti) 및 샨티데바(Shantideva)와 같은 나란다(Nalanda)승원 출신의 최고 인도 학자들은 티베트불교의 등불이다.”라고 말했다.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시주(Uttar Pradesh)에 위치한 사르나트(Sarnath)는 붓다께서 처음 설법하신 성지로서 무수히 많은 성자들이 방문한 곳입니다. 붓다께서 첫 법륜을 굴리신 이후에 빠알리어로 경전이 처음 성립되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네 가지 고귀한 지리를 설하셨고 그 후에 반야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이번 법회를 열며 붓다의 처음 설법을 추억하고자 남방불교에서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인 망갈라숫다(축복의 경)를 송하고자 합니다.   이번 법문은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으로서 보살행과 보리심을 증장하는 내용을 주제로 합니다. 나와 타인을 교대하는 수행법으로서 보리심을 어떠한 방법으로 키워야 하는가를 다룹니다. 법문은 한 번 듣는 것만으로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경전을 거듭 읽고 깊이 사유하여 체험으로 실행할 때 보살의 첫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 법문의 맛을 보면 우리의 정진과 결의가 커질 것입니다. 이번 법회를 머릿돌 삼아 <입보리행론>의 종이가 까맣게 닳도록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입보리행론>은 8세기 인도의 학자 샨티데바의 경론입니다. 보리심을 키우는 최고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란다승원의 대학자 샨타락시타의 제자 까말라실라의 저서는 티베트의 논서 텐규르(tengyur)를 통해 보다 섬세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옳은 동기가 중요합니다. 설법자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순수한 법을 설해야 합니다. 경쟁심과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한 의도가 없어야 합니다. 법을 청하는 이들은 가르침을 받은 이익을 공덕으로 회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인과의 도리입니다. 이 법회의 가피로서 해탈을 하고자 하는 그릇된 생각을 지녔다면 바로 잡으십시오. 해탈은 나 자신 스스로에게 달려 있습니다. 부디 이번 법문이 바른 해탈의 기회를 만드는 인연이 되도록 하십시오. 인간의 소중한 몸을 얻었으니 불법을 만나 보리심과 공성을 수행하여 이로서 일체 중생을 해탈 시키고자 하는 동기를 세워야 합니다. 티베트의 스물다섯 분파의 스승님들이 수행하여 얻은 깊은 깨달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승되어진 것은 모두 바른 동기의 인연입니다. 본인의 목표를 성취하고 타인의 목표 성취를 돕는데 이생의 인간 몸을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법문을 들은 이익으로서 모든 중생이 성불에 이르기를 우리 모두 함께 발원해봅시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기 200년 전에 이미 중국에 불교가 도입됐습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 중국이 아닌 인도의 범어에서 직접 수용되었습니다. 번뇌를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수행법과 본존불을 관상하는 수행법은 모두 인도의 스승들에 의해 직접 전해진 것입니다. 붓다께서 만다라의 본존불로 나투는 밀교 수행법은 선업을 짓고자 하는 제자들이 사사했습니다. 쫑카파 대사는 수행자의 순수한 집중력이 강할수록 삼매와 지혜의 힘으로 본존불을 실제 볼 수 있다고 설했습니다. 불성을 이루기 위해서 보살도로 나가야 합니다. 보리심만이 보살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까말라실라의 <선정차제>는 사마타인 안주명상과 비파사나인 분석명상을 다룹니다.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명상에 힘이 생깁니다. 명상의 대상에 치심과 자비를 일으키는 것이 안주명상이라면 분석명상은 무상을 깊이 사유하여 그 느낌을 이해하는 것으로 세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원만한 인연으로 불성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전지한 마음은 모든 곳에 있지 않습니다. 원인으로서 인연이 이어지며 원인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인연이 없으면 청정한 결과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집을 지을 때 튼튼한 기초가 필요하듯이 안정된 종교관이 성립될 때 평안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꽃에 의식이 있을까요? 자연 만물 역시 인연의 화합체입니다. 해바라기를 예로 들면, 아침에 동쪽으로 해를 바라보다가 해가 지면 서쪽을 향합니다. 중생심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 자체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이전의 원인에 의한 결과입니다. 여러 인연이 모이면 색깔과 모양이 생깁니다. 중생의 모든 불행과 행복은 업에 의해 발생된 것입니다. 업은 마음의 힘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불성의 성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선정으로서 가능합니다. 절대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불법은 이치를 바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혜의 눈은 경전 바탕이 아닌 이치로서 키워야 합니다. 붓다께서도 비구들에게 금을 다루듯 이치를 밝히라고 설하셨습니다. 용수보살과 모든 선지식께서도 모두 이치를 바탕으로 상대적인 논서를 저술했습니다. 현대과학과 불교의 교차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붓다가 무엇입니까?”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불법은 연기와 계율로서 설명돼야 합니다. 연기에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사성제는 진정한 행복의 원인을 만드는 방법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서 열두 가지 연기법은 무명을 극복하는 차제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출리심을 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부유할수록 시기심과 경쟁심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스님들에게서도 많이 보이는 경향입니다. 더욱이 물질적 부유와 소비지향주의는 마음의 결핍을 초래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항시 공허함을 안겨줍니다. 이러한 때에 종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최근 뇌과학자들의 실험 결과에 의해 자비명상을 통해 뇌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증명했습니다. 슬프고 우울할 때 활동하는 뇌의 영역과 타인에게 자비심을 일으킬 때 활동하는 영역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현대과학에서 뇌의 활동으로 미세한 마음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불법을 대할 때는 반드시 사유를 해서 이치에 맞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익숙함으로서 터득한 법의 체험을 타인과 나눌 수 있어야합니다. 아비달마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해야 할 것이며, 가르침에 의지하지 말고 의미에 의지하며, 상대적인 의미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은 열반을 무수히 경험합니다. 1월의 사르나트는 밤에 무척 춥지요. 그러나 오후가 되면 햇볕이 매우 강해집니다. 저는 지금 추위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 오후가 되니 무척 덥군요. 겉옷을 거둠으로써 지금 저는 더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작은 극락에 도달한 기분입니다. 보리심은 모든 악업을 극복하는 명약입니다. 죽음에 도달하는 그 순간까지 <입보리행론>으로서 보리심에 익숙해지십시오. 스님의 특별한 도움 없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년 9월 북인도 라다크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재난 지역에 방문해 기도 의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주인은 나라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 바탕에는 강렬한 보리심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중생을 위해 음식이 되고 공기가 되겠다고 발원을 하는 것이 보리심입니다. <입보리행론>은 보리심을 발하는 이를 위한 안내서로서 출리심과 계율 그리고 삼귀의를 기본 골자로 합니다. 보살이 어떻게 수행을 하며 어떻게 성불하는가를 다룹니다. 허공의 자성에는 구름이 없듯이, 우리가 지닌 일체 마음의 번뇌는 손님과 같습니다. 객진번뇌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청정자성과 분리되기에 객진이라고 합니다. 보리심과 공성을 말함에 있어서 공성의 열여섯 가지 관법으로서 일반적인 유식학의 견해에 근간합니다. 반면 중관에서 객진번뇌라 함은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지 사실 잊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대승수행을 한다는 것은 대승의 삼보를 향한 귀의로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얼마나 어려울까요. 사람이 불법이 유통되는 곳에 태어나 사부대중이 있으며 실제적으로 포살을 하는 비구승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은 거대한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최상의 배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악을 행하기 쉬운 환경에서 살기에 바른 행을 하기 어렵습니다. 윤회를 초월할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일체 죄를 소멸하는 열쇠가 바로 보리심입니다. 대승의 입문은 보리심을 발하였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있습니다. 보리심을 발한 선한 뿌리의 공덕은 일체 중생이 붓다에 오를 때까지 끝이 없이 증장할 것입니다. 붓다가 되는 인연은 대비심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방편이 다섯 바라밀과 지혜바라밀입니다. 자타상환법으로서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대치될 때만 비로소 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비심이 몸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자심으로서 일체 중생을 보면 환희하는 마음과, 일체 중생이 탐진치에 시달리고 있음을 완벽히 이해할 때 대자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체 중생을 위한 수승한 발심이 일어날 때 비로소 무상정등각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대승의 삼보에 귀의했다면 완벽한 출리심을 지니십시오. 이 모두는 일체 번뇌를 소멸하고 진정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스스로 무상한 존재임을 알아 찰나 변화하는 그 본성을 바로 볼 때,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법이 드러납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여인숙이요 생각은 나그네입니다. 몸과 생각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몸과 생각의 쾌락은 절대적인 행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아프지 않거나 분별할 것 없이 우리는 취사선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이라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덧없는 허망뿐입니다. 집착에 의해 내가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이들을 위해 내 몸이 지은 죄업이 사실 생각뿐이지 실제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지은 수많은 죄업만이 고스란히 남습니다. 무명의 업력으로 지은 죄업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기에 우리는 참회를 일으켜야 합니다. 붓다에게 자신의 몸을 올려 대자비심을 일으킨 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는 계율바라밀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정념과 정지로서 항시 자신을 살피하고 한 것으로 계율을 대신합니다. 항시 근신하여 대승의 보살행을 하십시오.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적이라는 것은 내쫓아도 다시 올수 있지만 번뇌는 지혜로서 완벽히 소멸 가능합니다. 항시 조심할 때 정진이 나옵니다. 삼매로써 아집과 법집을 멸하는 지혜가 발현됩니다. 용맹으로서 소멸시킨 번뇌는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근신이란 항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서 분노하는 대상과 분노의 실체 자성이 공함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항시 깨어 있으십시오. 삼매 수행에 있어서 마음속에서 혼침이 일어나는지 감시해야 합니다. 마음이 산란하거나 후회 혹은 멍한 상태로부터 깨어 있는 것, 신구의 삼업을 정확하게 알아차림이 ‘정지’입니다. 삼업 가운데 마음을 정확히 관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적천보살께서 권하기를, “정념과 정지로서 마음을 잘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으니, 이를 감시하는 것이 허술해지면 마음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맙니다. 마치 깨진 그릇에 물을 담는 것과 같습니다.
<입보리행론>의 특이점은 선정품에서 삼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타상환법이 선정품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원래 삼매란 일념으로 집중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자타상호교환법이 나오는가. 이유는 붓다의 경지에 가기 위해서는 오직 한 마음으로 수행함이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삼매 즉 오직 붓다를 이루기 위한 정진을 위한 기초 공사가 바로 인욕입니다. 이를테면, 보리심의 근거가 되는 것은 대비심이며, 대비심의 반대가 분노심입니다. 중생에 대한 분노심은 한량없는 자비로 대치해야 하는데 대자비를 방해하는 분노는 중생 속의 많은 방편으로 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항시 기쁠 수 있을까요? 올바른 견해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불편한 마음에 찰나라도 머물지 마십시오. 반드시 분명한 견해로서 기쁨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번뇌와 고통의 원인을 무수히 지어 온 반면 선의 원인은 매우 미약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많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출리심을 발현할 기회의 인연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인욕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수행자는 의연하게 대치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분노를 죽인 자를 영웅에 비유합니다.
<입보리행론>의 지혜품은 항시 삼매품과 동등하게 설해져 왔습니다. 결국 성불하는 대승 수행은 삼매와 지혜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반드시 대자비심과 공성의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보리심은 속제보리심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속제와 진제의 두 가지 보리심이 있어서 진제보리심을 설할 때는 삼매와 지혜가 동시에 이뤄져야 합니다. 삼매를 성취하는 방법과 정의 그리고 공덕을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 삼매를 닦아야 하는가. 실제 수행에서 공성의 견해는 무상을, 깨달음은 삼매를 바탕으로 합니다. 비유하면, 지혜는 말 위에 탄 사람과 같고 삼매는 말을 끌고 가는 힘입니다. 삼매란 무한한 정진력입니다. 수행에 임할 때에는 시간에 의연하게 강렬하고 선명히 집중하십시오. 붓다를 관하는 시간의 공덕은 한량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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