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주
조계종 총무원 주임
필자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도 우연이지만 봉암사에 가게 된 것은 더 우연이었다. 5~6년 전 불교계 언론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조계사 신도들이 봉암사에 ‘대중공양’을 간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중공양(大衆供養)은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격려하기 위해 다른 스님이나 신도들이 공양을 올리는 것’으로 예전에는 ‘공양’(식사)물을 준비해 직접 스님들에게 올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대부분 ‘보시금’(금일봉)을 전달하는 형태가 주를 이룬다.
‘봉암사’라는 ‘전설’을 조금씩 듣고 있던 나는 “따라 가야겠다”는 마음에 바로 선배들에게 이를 보고 했고, 동행 취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봉암사에 가서 ‘전설’을 직접 보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봉암사와의 인연은 벌써 10차례에 이른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 위치한 봉암사는 조계종립 특별수도원이다. 봉암사가 자리한 희양산을 온몸으로 막아낸 스님들과 종단이 의견을 모아 1982년 6월 종립 수도원으로 지정했다. 그래서 지금 일반 시민들은 1년에 한번 ‘부처님오신날’에만 봉암사를 참배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첫 번째로 보이는 것이 ‘출입금지’를 알리는 팝업 게시판일 정도로 봉암사는 철저하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수행한다.
봉암사가 최고의 수행도량임은 창건 당시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로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심충(沈忠)거사는 법랑선사(632∼?)와 신행선사(704∼774)의 법을 이은 지증선사에게 이곳을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처음엔 거절하던 선사는 희양산 일대를 둘러본 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봉황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였은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 같다(鳳巖龍谷)”며 경탄했다. 그리곤 “스님들이 수행하지 않으면 도적 소굴이 될 것”이라며 봉암사를 창건해, ‘해동에 들어선 선의 아홉 도량’가운데 희양산문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안거(安居)는 물론 안거가 끝난 이후의 산철결제도 수시로 열리는 곳이 봉암사다. 지금도 100여명의 대중이 화두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태고선원(太古禪院) 큰방에서는 하루 10시간, 성적당(惺寂堂)에서는 14시간, 관음전에서는 16시간씩 정진한다. 또 주지스님을 비롯한 ‘외호대중’역시 하루 8~10시간 이상 수행하는 것은 물론 희양산 깊숙이 위치한 암자에서도 스님들의 정진은 쉴 새 없이 계속된다.
이렇게 봉암사 태고선원이 ‘선원중의 선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47년 성철,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이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 것”을 결의하고 3년 여간 진행한 ‘봉암사 결사’ 역사에서 출발한다. 결사 말미에 합류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당시 빨치산이 총을 들고 들이닥쳐 쌀과 곶감까지 모조리 털어가는 사건을 직접 겪었다”며 “그 사건으로 결국 결사가 끝나고 말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봉암사 결사는 말 그대로 근현대 불교의 서막을 알리는 개벽이었다. 결사 당시 한국불교는 1600년간 이어져 온 불교 전통은 사라지고 왜색 불교가 판을 치고 있었다. 물론 경허, 만공, 한암스님 등이 한국불교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봉암사 결사는 시작됐다. 결사(結社)는 철저한 청규(淸規)에 기반해 이뤄졌다. 당시 성철스님이 마련한 17개항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은 지금의 한국불교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나침반과 같은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엄한 부처님 계법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근수역행(勤修力行)하여 구경성불의 원만한 속성(速成)을 기약함.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의 교칙(敎則) 이외의 각자 사견(私見)은 절대 배제함. △일상에 수용하는 것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나무 하고 밭 갈고 탁발(托鉢)하는 등, 어떠한 고역도 불사함. △소작인들의 세조(稅租)와 신도들의 특별 보시에 의한 생계는 단연 청산함. △신도들의 불전 공양은 각기 가져온 물건을 올리고, 지성 예배 드리는 것으로 그치게 함. △변소에 가거나 울력(運役)하고 잠 자는 때를 제하고는 항상 오조가사와 장삼을 착용토록 함. △외출할 때는 삿갓을 쓰고 석장(錫杖)을 짚고,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다닐 것. 가사는 비단 종류를 피하고, 이것을 괴색(壞色)해야 함. △발우는 목발(木鉢)을 피하고 철발(鐵鉢)이나 와발(瓦鉢)을 사용해야 함. △하루 한 차례 능엄주(楞嚴呪)를 일과로 지송토록 함. △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도록 할 것. △보름마다 계본(戒本)을 가지고 포살(布薩)을 시행토록 할 것. △불전에 공양을 오후에는 올리지 않으며 아침 공양을 죽으로 정함. △앉는 차서는 계납(戒臘)에 의해서 자리를 정함. △선방 내에서는 언제나 면벽관심(面壁觀心)하고 잡담하기를 엄금함.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눕거나 잠자는 일을 허락하지 아니함. △필요한 물건들을 각자가 마련해서 쓰도록 할 것. △이밖에 다른 규칙을 청규(淸規)나 대소승의 율법에 준하도록 함.
비록 한국전쟁의 기운이 드리워지면서 결사는 3년여만에 끝났지만 당시의 결사정신은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조계종단 운영의 큰 바탕이 되고 있다. 지난 2007년 조계종은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에도 참회와 재도약을 위한 법회를 열기도 했다.
봉암사는 개인의 이익이나 문중 개념이 없다. 오로지 대중스님의 뜻에 따라 절살림이 운영되는 대중공의제도가 완벽하게 실행되는 도량이다. 최근 새롭게 주지로 부임한 원타스님은 “주지 임명장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중들이 주지를 뽑았으면 됐지, 무슨 임명장이냐?”는 것이다. 주지도 대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봉암사는 최근 지난 수년간 공석이었던 ‘조실(祖室)’ 격의 수좌스님을 새로 모시면서 활발발한 선풍을 다시 드날리고 있다. 봉화 금봉암 고우스님과 함께 선방의 어른으로 추앙받고 있는 적명스님은 “조실은 맞지 않다. 수좌(首座)로서 봉암사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혀 지금은 수좌스님으로 후학들을 제접하며 동방장(東方丈)실을 지키고 있다.
적명스님은 “불교의 핵심은 연기(緣起)에 있다. 부처님 역시 이것을 깨달으신 것이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또 “화두를 하루 10분씩만이라도 규칙적으로 참구하면 내면에 변화가 온다. 꼭 해보라”며 일상속의 수행을 거듭 당부했다.
희양산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처럼 수행도량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봉암사. 종립선원으로서 가풍을 올곧게 이어가는 조계종풍(曹溪宗風) 근거지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