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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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창건의 공덕

편집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16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보니 전국에 걸쳐 수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명산이라 불리는 곳은 물론 이름 없는 산의 벼랑 끝에도 사찰은 세워졌다. 사찰이 이렇게 많이 생겨난 것은 민족과 고난을 함께 해온 불교의 긴 역사에도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 공덕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귀족이었던 김대성이 현생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것도 그 공덕으로 부모의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함이었다. 사찰 창건의 공덕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때는 고려의 장수로 있던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했을 무렵입니다.
조선의 개국에 기여했던 공신 중에 조림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궁궐에서 돌아온 조림은 밤늦도록 시름에 잠겨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오라는 어명(御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신으로 떠나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서너 달이 걸리는 긴 여정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명나라로 가는 것은 달랐습니다. 죽기 위해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위험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명나라에서는 ‘신하가 왕을 몰아내고 세운 역적의 나라’라는 이유로 앞서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기 위해 보냈던 조선 사신들을 모두 참수한 바 있었습니다. 조림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묘안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두려워 사신으로 가지 못하겠노라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며칠 후 사신 행렬은 한양을 출발해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으로 출발했습니다. 조림은 말에 오른 채 말잡이꾼이 이끄는 데로 걸음을 재촉하는 한편 가슴을 짓누르는 근심을 떨쳐내기 위해 ‘나무관세음보살’을 염송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달래길 며칠, 조림 일행이 황해도 서흥군을 지날 때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일행은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저녁밥을 먹은 일행 대부분이 잠자리에 들었지만 조림은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어슴프레 잠이 들었을 때 조림의 방안에 갑자기 세 명의 나이어린 사미승이 가사장삼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대감께서는 왜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십니까?”
“어린 스님들께 말씀을 드려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조림은 사미승의 갑작스런 등장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져 있던 터라 조금은 퉁명스럽게 사미승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사미승들은 조림의 퉁명스런 대답에도 아랑곳 않고 말했습니다.
“대감의 심정은 들어보지 않아도 이미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주막 뒷길로 올라가 보십시오. 몇 리를 올라가다보면 큰 절터가 나오고, 그 옆에 돌부처님이 세분 나란히 서 계실 것입니다. 그곳에 새로이 절을 지으신다면 고민하시는 문제가 쉽게 풀릴 것입니다.”
조림은 잠이 깼지만 사미승과의 만남이 꿈이었는데, 생시인 것만 같았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 다시 잠을 청한 조림은 똑같은 꿈을 연이어 세 번이나 꾸었습니다.
첫닭 우는소리에 잠이 깬 조림은 평범한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밝아오자 주모를 불렀습니다.
“주막 뒤쪽에 절터가 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예, 나으리. 있고 말구요. 고구려 때 지은 절인데 그 둘레가 오리가 넘는답니다.”
조림은 주모에게 재차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혹시 그 절터에 석불도 세 분 계시던가?”
“아니, 대감께서는 어찌 그것도 알고 계십니까? 석불님도 계시고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도 그대로 있습니다요.”
수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길을 나선 조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절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절터 옆에는 사미승들의 얘기처럼 세 분의 석불이 우뚝 서 계셨습니다. 하지만 세 분 부처님의 주변은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농사에 쓰기 위해 똥거름을 군데군데 쌓아둬 냄새도 참기 힘들었고, 주변에는 잡초가 어린아이 키만큼이나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습니다.
주막으로 돌아온 조림은 황해도 감사를 찾아가 사찰의 재건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어명을 받은 신하가 중대한 공무를 앞두고 꿈속의 일을 핑계로 사찰을 짓느라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공사를 서둘러 명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을 향해 떠났습니다.
두 달 가까운 여정 끝에 사신 일행은 연경에 도착해 명나라 초대 황제인 홍무제(태조 주원장)를 배알하게 되었습니다. 홍무제는 고려의 신하로 명나라를 오간 적이 있는 조림을 알고 있었지만 냉담한 표정을 지으며 “이성계는 왕을 몰아낸 역적”이란 말을 되풀이하며 사신을 데려다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조림은 끌려가면서 한숨만 내쉴 뿐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로부터 어명을 받았을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양을 떠나오는 길에 습관적으로 외웠던 염불을 그때도 중얼거렸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조림이 형장에 끌려갔을 때 형리가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조림은 돗자리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동쪽을 향해 일 배를 올리며 말했습니다.
“나라의 명을 받고도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면목이 없습니다. 전하, 용서하소서.”
조림은 다시 삼배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부처님, 이곳으로 오면서 부처님을 편히 모시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조림은 마지막으로 일배를 더 올리며 말했습니다.
“제가 죽는 것은 서럽지 않으나 연로하신 어머님을 두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게 된 불효함을 용서하십시오.”
드디어 망나니가 조림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싹둑 잘려나가야 할 조림의 목은 멀쩡한데 반해 ‘깡’하는 소리와 함께 망나니가 휘두른 칼이 두 동강나고 말았습니다. 망나니는 칼을 새로 가져와 다시 내리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일은 곧바로 홍무제에게 알려졌습니다. 황제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도 없었고, 한번 내린 어명을 다시 거두기엔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형장으로 가서 활을 쏴 죽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궁수들은 조림을 나무에 묶어놓고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날아간 화살은 조림의 가슴 앞에서 보이지 않는 방패에 가로막힌 듯 부딪힌 후 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명나라 홍무제는 그때서야 조림에게 다가와 팔을 묶고 있던 오라를 직접 풀어주며 말했습니다.
“조정승, 칼로도 화살로도 당신을 해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이성계도 나처럼 왕이 될 천운을 타고 났나보오. 국호는 그대들의 뜻대로 ‘조선’이라 정하도록 하시오.”


조림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새로운 왕조를 인정하겠다는 답을 듣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길을 재촉해 황해도 서흥에 도착했을 때 연경길에 머물렀던 주막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주막 주위는 인근 백성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조림은 백성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인가?”
“예, 저 뒤편에 폐사지가 있었는데 몇 달 전부터 중창불사가 시작되더니 드디어 오늘 낙성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조림은 황해도 감사에게 부탁했던 사찰의 불사가 벌써 완공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림 역시 일행들과 함께 낙성식을 보기 위해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고개를 든 조림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세 분의 부처님 중 두 분의 목에는 칼에 베인 듯 긴 상처가 나 있었고, 다른 한 분의 부처님은 가슴이 뾰쪽한 것에 찔린 듯 상처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조림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부처님 앞에 엎드려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후에 이 일을 전해들은 태조 이성계는 신하의 목숨을 구해준 사찰이라 하여 ‘속명사(續命寺)’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사찰 창건이나 불사에 동참하는 것이 꼭 거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불자의 마음가짐이다. 양나라 무제가 사찰 49곳을 지은 공덕을 물었을 때 달마대사가 “무공덕(無功德)”이라고 말한 것은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자신의 장수와 극락왕생을 위해 작은 것을 내놓은 공덕은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가난한 여인이 밝힌 등불이 가장 오랫동안 불을 밝혔다는 빈녀일등(貧女一燈)의 교훈처럼 불사의 동참에는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깃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와 한 장, 벽돌 한 장을 보시하더라도 나보다 남을 먼저 위하는 보살의 어진 마음이 바탕이 된다면 불사 동참은 참다운 공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교화를 하던 초기에는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최초의 사찰은 어디일까? 바로 인도 마가다국의 빔비사라국왕이 지은 죽림정사이다. 이 사찰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불리는 기원정사와 함께 인도의 2대 정사로 불린다. 기원정사는 인도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사위성 남쪽에 있던 기타태자 소유의 동산에 지은 절로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가 희사한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