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3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생활의 지혜
    고전속의 명구감상
    불교설화
    반야샘터
    반야샘터2
    즐거움을 뿌려라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의로운 실천(돈점頓漸)

현재호


후애마이(Who am I)연구소 소장·Blog.daum.net/hyun-jaeho


지난 호에는 ‘무정설법’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무정설법을 맛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실천입니다. 이번 호에는 실천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진리를 위한 의로운 실천(돈점頓漸)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불자들은 저마다 이야기 합니다.
‘불경을 아무리 봐도 알 듯 말 듯 해’
‘아무래도 깊은 수행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위빠사나를 해볼까?’
‘간화선이 좋을까?’
‘정통 불교 교리를 공부 해 보고 싶어’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어’
‘불교는 너무 어려워’


무엇이 문제이기에 답 없는 질문만 난무 한지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어려운 것 맞습니다. 불교가 어렵다면, 성경은 쉬울까요? 얼핏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볼까요?
성경의 베드로 전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에게 악행을 저지른 자의 이름을 받들어 하나님께 찬양하라’


나에게 악행을 저지른 자에게 복수를 해도 부족할 판에 용서도 아니고 그 사람 잘되라고 하나님께 찬양까지 하라니? 이게 웬 말입니까? 하지만 잘 되라고 빌어 줘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성경에서도 곳곳에 많은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종교의 구분을 떠나 이러한 깊은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불교에서는 「보왕삼매론」 정도는 완벽히 소화하고, 그 원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교리가 어려운 것은 경전에서 추구하는 진리와 우리의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다를 것도 없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진리와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생활에 젖어, 이제는 삶의 길과 진리의 길이 기찻길처럼 끝없이 평행하게 놓여있을 뿐 삶과 진리가 만나는 합일점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요원한 만큼이나 우리의 삶은 늘 어지럽게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삶과 진리를 애초에 다르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실천과 반복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일요법회에서 법문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말인지 알아, 하지만 그렇게 생활 할 수는 없잖아’


왜 없습니까? 하면 되는 것이지요.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법문 속의 진리를 알아듣기는 하나(돈頓) 마음의 길과 다르기 때문에 실천(점漸) 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미 실천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와 삶을 융합하는 시간을 재촉해 보시지요. 아울러 진정한 불자의 길은 공부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반드시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돈점頓漸의 가르침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1. 실천이 없으면 불교가 아니다


모든 불경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해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자는 깨닫고자 하지만, 사실 단순한 의미에서 볼 때 깨닫지 않은 불자는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깨달았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경계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 이 일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이미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서의 ‘앎’입니다. 이른바 ‘아름알이’라고 하는 이 ‘앎’은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실천 없는 ‘앎’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요즘 대대적인 금연 운동으로 인하여 애연가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고 있죠?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이미 그것을 모르는 흡연자는 없습니다. 해롭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죠. 하지만 담배를 멀리 하지는 않습니다.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앎과 실천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명명백백한 ‘예’입니다. 앎이 돈頓이요 실천은 점漸인 것입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듯, 점漸(실천)이 없는 돈頓(앎)은 오히려 삶을 어지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지요.
흔히 불교는 공부하는 종교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소 착각(그릇된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공부라 함은 불교 경전 공부가 아닙니다. 진리를 기반으로 한 삶의 공부입니다. 교리를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하여 행동으로 말로서 그리고 마음으로써 얼마나 노력하고 실천하는가 입니다. 이것은 곧 마음공부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마음공부를 위하여 삶에서의 노곤함, 스트레스 등을 ‘인욕바라밀’하며 실천을 거듭하여 진리에 부합된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생활 불교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 아니었을까요? 부처님은 불자들에게 몸에서 황금빛이 나는 부처가 되라고 설한 바가 없습니다. 마음의 불성을 찾아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가르쳤을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불교를 돈점頓漸으로 설명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점頓漸이란?
돈頓 : 탁 부러지다, 자르다, 그 자리에서 꺾이다, 고개를 숙이다, 절복하다
(불교적 의미 : 단박에 알아차림, 단박에 깨침, 깨침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점漸 : 스미다, 젖어 들다, 번지다, 흐르다, 자라나다, 차츰차츰, 천천히 나아가다
(불교적 의미 : 오염된 마음을 진리의 마음으로 갈아 치우려면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반복 또 반복하여 실천하여야 함)
이치는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듯 단박에 깨치지만, 그것은 이론을 알아챈 것 일뿐, 진정한 깨침을 위해서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몸에 베이도록, 자신의 습관을
바꿀 만큼 행동으로, 말로, 마음으로 실천을 거듭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몸에 베이고 나면 비로소 앞서 깨친 것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대오大悟’를 맛볼 수 있는 것. 그러한 흐름과 방법을 알려주는 깊은 가르침이 바로 돈점 임.


2. 삶이 진리와 멀어진 까닭은 왜일까?


강아지를 반려견으로 입양한 집에서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강아지가 주인을 닮는 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일 같지만, 알고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강아지는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 의식주가 해결되므로 주인에게 자신을 맞춥니다. 하지만 어떻게 주인의 습성까지 알아채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는 것일까요?


사람을 비롯한 동물에게는 육안肉眼이 있습니다. 실제 눈이죠? 그리고 심안心眼이 있습니다. 물론 내재된 불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불안佛眼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안眼 중에 주로 무엇을 사용합니까? 육안입니다. 오로지 육안만 사용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어찌 강아지는 사람의 습성까지 알아채는데, 같은 사람끼리 어떻게 사람을 못 알아볼까? (이래서 사기 맞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은 자기가 아는 범위와 경험한 사례를 기반으로 육안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이르는 안근眼根이라고 하는 육안肉眼은 눈앞에 펼치진 전경(색경色境)을 볼 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무안無眼과 무색無色을 설하지 않았습니까?) 안근眼根으로는 말 그대로 자신의 근根기에 맞추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겠습니까? 겉모습만 볼 뿐이지요.


강아지는 말(언어)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니 늘 묵언 수행입니다. 더불어 강아지는 주변의 기운을 알아차립니다. 주인이 화가 났는지, 기분이 좋은지, 성격은 어떠한지 등 단박에 알아챕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런 기능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강아지는 주인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으므로 어쩌면 매우 열정적 본능으로 주인의 습성을 알아채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강아지는 육안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네 사용하죠. 하지만 육안은 사물을 구분할 뿐 강아지는 사물의 속내를 알아보는 심안心眼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강아지는 돈 없는 주인을 만났다고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도 않으며 부자 집에 입양된 다른 강아지를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며 늘 주인에게 충직합니다.
실체와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기에 눈앞에 펼쳐진 것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인간 세상. 그 과정에서 희로애락이 구분되고 오욕락이 벌어집니다. 눈앞의 달콤함과 눈속임을 추구하는 삶이 결국 심안의 능력을 퇴화 시킨 것입니다. 육안만으로는 진리의 삶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無안이비설신의, 無색성향미촉법이 그래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이르듯 피안의 길로 넘어가려면(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육안의 초라함을 빨리 깨닫고 자신의 심안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번뇌는 먼지와도 같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봅니다.
1. 번뇌는 먼지처럼 매일 쌓이므로 하루라도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2. 매일 수행을 하여야 하며 생활 속에서 수행의 요소를 찾으라.
3. 앞을 못 보게 하는 먼지처럼 번뇌는 너의 심안을 흐트러트린다.
4. 본질은 그대로 있으나 먼지로 덮여 일을 뿐, 닦아내면 진실을 볼 수 있다.
5. 매일 같이 먼지를 닦아 내야 한다.
6. 일일정진 수행을 게을리 하면 진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진리의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심안이 열리지 않습니다. 먼지 덮인 심안을 활짝 개안開眼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먼지(오염된 마음)를 털어내면(생활수행) 진리의 삶이 다가 올 것입니다.


3. 진리의 삶


돈점頓漸으로 배웠듯이 실천을 통하여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진리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그 덕목을 정해야 합니다. 어떤 불경도 좋으니, 다만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깊이 묻어 믿고, 따르면 됩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하면 조금이나마 심안의 맛을 보게 됩니다. 이를 두고 ‘한암대종사’는 깨침은 낮에 졸리어 낮잠 자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이 있지요. 멀쩡한 두 눈이 뭐가 어두워졌단 말입니까? 그 순간 시각 장애가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육안은 멀쩡한데 심안心眼이 어두워졌음을 뜻하는 말이겠습니다.
무엇부터 실천하여야 진리의 삶이 가까워져서 심안이 열릴지…. 『금강경』에서 힌트를 얻어 볼까요.
보살이 만약 마음을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 가운데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만약 마음을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햇빛 아래서 갖가지 온갖 물체를 분별해 보는 것과 같나니라 - 『금강반야바라밀경』 중에서 -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내 이익이 얼마 인지 계산하는 마음으로 뭔가를 한다면, 당장은 뭔가 이득이 있는 듯이 느껴지지만, 결말은 좋지 않죠. 하지만 내 이익 보다는 조직의 이익, 타인의 이익을 먼저 고려한다면 내 것은 당연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두려운 것은 자신이 손해 볼 것이라는 생각 때문 아니겠습니까? 햇빛아래 온갖 사물을 분별한다는 것은 심안의 개안이라고 보셔도 좋습니다. 언제 심안이 열린다고요? 진정한 마음으로 남을 위하고 이러함을 반복하는 행위를 실천으로 옮길 때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요. 하지만 (심안이 열린다는데) 해 볼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실천의 첫 번째 덕목은 무주상보시가 1순위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불교를 잘 알고 싶으신 분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 분
삶이 곤궁해져 세상이 힘들다고 생각 되시는 분
막연한 목적으로 하염없이 간화선에 매달리시는 분
무리한 수행으로 상기병을 앓아 보신 분
아무리 공부를 해도 뭐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 되시는 분
어느 정도 불교교리 안다고 자부하시는 분
불경이란 불경은 거의 다 읽어 봤다고 자부하시는 분
위빠사나 수행을 해 보신 분
속 터질 때 법당가면 그나마 개운함을 느끼는 분
30년 절에 다녀서 아상만 쌓이신 분


이런 모든 분에게 권합니다. 불교는 안다고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모른다고 낙담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특별한 수행법을 익혔다고 해서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기본에 충실하여 실천이 반복될 때 비로소 심안이 열리면서 진리의 틈새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의 1순위는 ‘보시’입니다.


보시는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니 지금 이 순간 죽을 만큼 힘들어도 ‘무재칠시’(재물이 없어도 보시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만 실천하시면 살길이 열립니다. 점점漸漸 살길이 열리십니다.(그래서 실천이 점漸임)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장하신 내용입니다.
간화선, 위빠사나 등 다 좋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실천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이타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발보리심發菩提心)이 생겼다면 행동 하십시오. 처음에는 매우 어색합니다. 하지만 곧 익숙해집니다.(행보리심行菩提心) 익숙해지는 그 순간,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지 느끼시게 됩니다. 그 때부터 심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심안이 열린 것을 보고 혹자는 ‘타심통’이 열리어 육신통의 맛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대단한 착각입니다. 심안은 심안일 뿐, 타심통과는 다릅니다. 고도의 심안이 신통력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본래 동물에게 있었던 감각의 요소를 조금 찾았을 뿐, 이것을 별스러운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자랑하거나 남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심안이 열린듯하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그 순간 그 능력이 사그라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는 숙연해야 합니다. 실천도 조용히, 다짐도 조용히, 늘 묵언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 한 듯, 하지 않은 듯, 늘 조용히, 법당을 거니는 마음자세로 사뿐사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함에 있어서 너무도 어색합니다. 전쟁 직후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를 바탕으로 고도의 성장을 거듭해왔고, 그 과정에서 옆도 뒤도 볼 새가 없었습니다.
당분간 성장의 맛을 보았는지 모르지만, 화무도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그렇게 인간미 없는 고도의 성장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이제는 ‘배려’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내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배려’를 넘어서
‘위함’을 고려하고 실천하여야 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할 줄 모르면서 불교 교리를 배우고 경전을 배운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교 논리에 어긋납니다.


그 말은 공부의 성과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남을 위하기는커녕 욕심과 욕망을 가슴에 남겨둔 채, 간화선이든 위빠사나든 수행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인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위험한 행동인지도 모르며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수행이 마음을 정화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불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수행법은 ‘생활수행’으로써, 이는 현실의 삶 속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각종 스트레스와 억울함 등을 바탕으로 바라밀 수행을 행하는 반복적 수련을 통하여 진리의 참뜻을 깨닫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점漸인 것입니다. 그 과정 이후에 여러 가지 이름난 수행법을 익힌다면 빠르게 결과를 얻을 지도 모르지요.
모든 불자님들의 의로운 실천(돈점)으로, 한시바삐 심안이 열리어,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 초석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