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에서 입멸까지 -
하춘생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수료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한 고따마 붓다는 비로소 ‘스스로 절대자의 정신적 기쁨(自受用法樂)’을 누리며 보리수 아래에서 맘껏 유희하였다. 여러 율본들은 사칠일(28일) 혹은 칠칠일(49일) 동안 여기저기 나무아래에서 홀로 가부좌하고 열반락을 즐겼다고 전한다. 붓다는 열반락을 즐기는 동안 삼라만상은 하나도 남김없이 서로 얽히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연기(緣起)의 법칙이었다. 붓다는 십이인연을 역순으로 관찰했다. 즉, 무명(無明)이 멸하면 행(行)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識)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名色)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면 육입(六入)이 멸하고, 육입이 멸하면 촉(觸)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수(受)가 멸하고, 수가 멸하면 애(愛)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취(取)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유(有)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생(生)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노사((老死)가 멸하여 모든 괴로움의 쌓임이 멸진한다는 연기의 이법을 바로 본 것이다.
 
성도직후 설법보다 침묵 선택한 붓다
 
붓다가 싯다르타 태자시절 출가를 단행한 이유는 이 글(上)에서도 밝혔듯이 자신의 생사해탈의 문제였다. 붓다는 성도직후 정신적 기쁨을 즐기는 과정에서 연기의 이법을 순관과 역관으로 통찰했듯이 깨달은 내용을 반복해서 정리해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붓다가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중생에게 전하는 전도의 문제, 설법의 문제를 놓고 망설였다는 점이다. 붓다가 법의 전도와 중생설법의 문제를 놓고 주저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중생제도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랬다. “만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목표는 교단이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 6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에 나설 것을 당부하면서 붓다가 천명한 ‘전도선언’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성도직후 붓다의 생각이 설법보다는 침묵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은 초기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성찰하신 후 진리를 설하지 않고 그냥 있기로 마음을 정하셨다.”(전재성역주, 《쌍윳따니까야》1, p.408)
 
그것은 분명 위기였다. 불교의 위대한 사상이 싹틔울 기회조차 없이 붓다의 가슴에만 간직된 채 붓다의 죽음과 함께 그대로 묻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붓다는 침묵을 깨고 길 위의 전도사로서 중생설법의 결의를 다졌다. 마침내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붓다의 위없는 깨달음의 교의가 뭇 중생에게 설해지는 결단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붓다의 이러한 심리변화과정을 경전은 ‘범천의 권청’이라는 신화적 수법을 통해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붓다는 이제 깨달음의 진리를 누구에게 먼저 전할까 고민했다. 수행시절 사사했던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 알라라 깔라마(Ālāra-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Rāmaputta)를 찾아가고자 했으나 이미 이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붓다는 우루벨라촌의 가야를 떠나 바라나시로 가던 길에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를 개조로 하고 있는 아지비까(Ajīvika, 邪命外道)교도 우빠까(Upaka)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우빠까는 붓다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길로 떠나버렸다.
붓다는 가야에서 직선거리로 200㎞ 떨어져 있는 까시의 수도인 바라나시 근처 이씨빠따나의 녹야원을 찾아 고행시절 도반이었던 아야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가르침을 전했다. 초전법륜, 만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전법의 여로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차별을 떠나 일체중생에게 진리를 설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당시 인도를 지배했던 바라문교, 특히 우파니샤드의 철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사상을 사자상승으로 전수해왔기에 지극히 제한적이고 비밀리 전해온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불교가 훗날 보편적 가치로서 세계종교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러한 차별없는 가르침의 전파와 공개성 때문이었다.
붓다가 깨달음의 기쁨을 즐기면서 그대로 입멸하려고 결의한 것과 범천권청을 받아들여 모든 사람에게 가르침을 설하기로 결심한 것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 그 첫째는, 대승은 일체중생구제를 목표로 하기에 자신의 깨달음에 만족하는 입장을 소승이라고 폄하했다. 범천권청 전후의 붓다를 소․대승의 범주에서 이해하게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범천권청은 대․소승을 모두 아우르는 전불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범천권청 이전의 붓다는 깨달음의 비밀을 숨기는데, 범천권청 이후의 붓다는 일체중생에게 깨달은 내용을 설법하는 결단의 행보에 나섰다. 전자는 신비․직관을 체험하는 세계이며, 후자는 진리를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붓다는 그렇듯 초전법륜을 시작으로 45년간 오로지 길 위에서 성직자와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는 법문을 설했다. 80세 되던 해 말라의 수도 꾸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머리는 북쪽으로 몸은 서쪽으로 향하고, 바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붙여 발을 포개고 누운 채로 고요하고도 지극히 평범하게 열반에 들었다. “자기자신과 법에 귀의하고 자기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아 이 세상 모든 것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서….
 
이타의 삶 체계화…불교의 궁극적 목표로 승화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붓다의 인간적인 면을 중심으로 그의 일생을 살펴보았다. 태자시절 싯다르타의 고민은 생․노․병․사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의 문제였다. 싯다르타 자신의 개체로 한정된 출가이전의 고민은 뭇 삶들의 고민 그 자체였으며, 그 해결은 성도이후 중생설법의 현장에서 현현됐다.
붓다가 성도직후 ‘스스로 절대자의 정신적 기쁨’을 유희하면서도 선뜻 세상으로 나오기를 주저했던 고민은 타인의 문제, 즉 스스로 깨달은 연기의 이법을 설했을 경우 중생제도에 얼마만큼의 성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의 인간적인 의구심이었다. ‘범천권청’으로 상징화한 붓다의 고민은 대승불교발달의 최고단계로서 법신불(法身佛)의 자정적(自淨的) 이타행으로 체계화되면서 해결되었다. 즉, 법계를 체(體)로 삼아 상상근기의 중생에서부터 하하근기의 중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도하겠다는 것이 성도직후 범천권청을 수용한 붓다의 결심이었고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가름하여 ‘싯다르타의 고민’과 ‘붓다의 고민’의 상관성은 자기자신을 체로 삼는 개체로서의 구경열반(究竟涅槃)을 법계를 체로 삼아 구경방편(究竟方便)으로 그 체를 넓혀가는 노력의 ‘현실’과 ‘구현’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법계위신지위불(法界爲身之謂佛), 부처(佛)의 본질이 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