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거역하는 향기 따라 요석의 남자를 만나다
이서연
시인
물빛이 산빛이요, 바람빛이 꽃물을 이루는 계절에 숲에서 내려오는 향기는 먼 얘기로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까지 술렁이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꽃향에 속가슴 뛰는 나날이건만 새로 돋은 이파리에 입맞춤한 바람이 들숨과 날숨사이에 길을 낸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안녕해야 할 모든 이들이 마치 풍경처럼 그 길을 지나간다. 지금 나는 안녕한가. 안녕해야 하는 하루를 위해서 화담과 양사언과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는 소요산을 찾았다. 높지 않아도 명산이란 명찰을 달고, 크지 않아도 아름다운 산으로 알려진 산이다. 몇 번을 와도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다른 맛을 주는 산이기도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궁금한 얘기가 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효, 그 사상과 자취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불교에 스토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명소마다 새겨진 이름이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피곤에 지쳐 잠이 든 곳이 무덤이었고,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토하다가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라고 깨닫는다. 그리곤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며 되돌아와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원효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큰 일화다. 당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 괴리가 있었을 때이므로 원효의 대중교화는 센세이션한 사건이었으리라.
누구나 진리를 구하기 위해 유학을 가는 건 아니다. 유학을 다녀와야 진리를 구하는 방안이 마련되는 것도 아니리라. 이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건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치열함의 여정이라는 재미없게 뻔한 답 뿐이다. 해골물이라도 마셔야 깨닫는 게 아니라 숨을 쉬고 들이쉬는 그 찰나에도 ‘참 나’를 깨달으려는 마음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니까.
떠나서 얻은 것은 나의 무엇인가
돌아와 잃은 것은 무엇하던 나인가
도돌이표가 찍힌 삶에 바람은 뼈를 깎고
쉼표가 흩어지는 자리에 깎인 뼈들이 주소를 새긴다
여기, 지금 서 있는 ‘나’를 알고프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란 못생긴 착각부터 끊는 게 순서이듯
저절로 알게 된다는 야무진 무지도 버리는 게 용기다
-「삶이 여행같아서」 중에서-
그나저나 원효는 무슨 이유로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 것이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한 것일까. 자재암은 원효와 요석의 이야기를 곳곳에 묻어두고 있다. 그 ‘묘심妙心’의 껍질을 벗겨 보라는 듯이 쏟아지는 폭포가 연한 빛 사이로 법고法鼓를 울린다. 두 사람이 사이에 설총이 없었다면 하룻밤 켠 촛불은 그냥 촛농으로 흐르고 말았을 것이다. 자재암 문턱, 봄의 결처럼 흐르는 원효폭포에 서 보니 그 조차 뻔한 얘기라고 가볍게 여기기에는 쉽게 그럴 수 없는 묘법이 느껴진다.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면서 곳곳을 다니며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원초적 목적 같은 구절이다. ‘걸림 없는’ 이 주제가 고집스런 수행을 불러일으키는 마법 역할을 한다. 쉬운 듯 쉽지 않은 경계, 자칫 어떤 기교를 들이대서는 속물적 허물만 들키게 된다.
자재암에는 당시 요석의 기도처럼 흐르는 폭포를 법당 앞에 두고 있다. 폭포를 뒤로 하고 염불하는 스님에게 고요 속의 평온이 느껴진다. 산신각으로 올라가 암자를 내려다보면 연록빛 바람에 치장된 작은 도량이 업연에 굴복된 숙명, 숙명 앞에 맺어진 인연의 이치를 담아낸 듯한 풍경이다. 누구에게는 부질없는 사랑이요, 기도일 수 있겠지만 사랑과 마주할 수 없는 곳에서 아들과 기도하는 여인의 이름이 시대를 넘어서도 이렇게 남는구나 싶다.
물 한 잔 마실 샘에도 원효, 바위와 굴에도 원효와 요석공주의 그림자를 세워 둔 도량에 불을 켜려고 준비한 연등이 생각의 염주처럼 걸려 있다. 굴법당에서 잠시 ‘나는 지금 어디로 가려고 이 자리에 바람이 되었는가’ 묻고 나왔다.
산사를 가려고 카페를 가는 것도 아니고, 카페를 가려고 산사를 가는 건 더욱 아니지만 팬더믹 시대에는 이상적인 문화가 절박한 현실 앞에 흔들릴 때가 있다. 계곡의 아름다움처럼 차 맛도 아름답다고 소문났던 카페가 매점으로 바뀐 자리에서 오미자 한 잔을 들고 산책을 이어갔다. 그리고 앉는 자리에 차 한 잔 놓고 스스로 카페를 짓는다. 갇힌 공간이 아니면 소요산 자체가 카페가 되는 것이다. 오늘 산사 카페는 이 멋이 제대로다.
다시 원효를 생각해 본다. 원효의 화두는 공격적 깨달음의 방향을 주고 있다. 호감이든 반감이든 물이 흐르는 곳에 길이 생기고, 바람의 결대로 호흡의 길이 달라진다. 깨달음을 얻고도 게으르지 않게 부지런히 수행한 원효, 그리고 그 수행의 주체에 길을 열어 준 관세음보살의 화현이 담긴 도량에 마음으로 초를 밝혀 본다.
설총의 어미가 아닙니다
미소도 아니고 눈물도 아닙니다
어디에 놓인 자리가 진여의 세계인지도 모르는 범부
꽃도 아닌 채 잎으로 피고
잎이 피기 전 꽃향을 날리는 이치의 행원行願
그런 계절의 인연 따라 온 길에
관세음보살 화현을 믿고 도량을 돌다 문득
불 밝힌 자리에서 물어 봅니다
그녀를 사랑하셨나요
그냥, 시절업연에 극진했던 것인가요
기억할 자리에 없는 것도 깨달음인가요
기도는 하루를 하든, 백일을 하든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백일 기도도 매일 하루 기도처럼 해야 하고, 하루 기도를 하더라도 백일 기도 하듯 절박해야 한다. 때 이르게 초여름 날씨를 보내는 날, 오미자 차는 감로다. 붉은 빛 감로로 온 몸을 감싸는 듯한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남은 글을 읊어 본다.
기억의 언덕을 지웁니다
그만큼 눈물이 폭포되어 흐릅니다
그 때 접은 마음이 꽃불로 밝혀지는 날이니까요
-「그냥, 원효에게 묻다」
오미자 한 모금 마시려 입마개를 열 때마다 미소가 지어진다. 이렇게 사는 날도 있고, 저렇게 사는 날도 있는 것. 지금 이렇게 안녕한 내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