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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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기도는 버리고 비우는 공부

  한국불교 미래, 수행 정진에 있다.



  주경스님
  서산 부석사 주지, 중앙종회 사무처장



음력 4월 보름, 하안거 결제에 들어왔다. 여름 석 달간 선원에서는 참선정진에 매진하고, 대부분의 일반 사찰에서는 100일기도에 들었다.

안거는 불교교단과 불자들 모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승가에서 해를 계산하는 기준과 스님들의 법납(法臘)을 따지는 근거를 안거의 마침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안거의 개념은 대중과 함께 수행을 하고 지낸 햇수를 계산하는데 있다. 즉 원래 스님들의 법납은 안거를 지내면 한 해가 더해지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하고 성숙해진다는 의미가 있다. 스님들이 안거를 기준으로 법납을 따지는 이유도 안거를 지내면 수행과 정진이 더욱 깊어지고 덕이 높아지는 까닭이다. 단순히 세월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대중가운데서 엄밀한 수행생활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실 신도들도 내가 절에 몇 십 년을 다녔느니 하는 부질없는 자부심보다는 몇 번이나 백일기도에 정성껏 참여하고 회향했는지, 또는 사찰에서 마련한 공부와 수행의 기회에 얼마나 참석했는지 스스로 묻고 돌아보아 안거의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마다 안거와 기도에 들어가면서 각기 목표를 세우게 된다. ‘이번 철에는 반드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리라.’ 이런 목표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 그 목표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선원의 초심자들은 묵언정진이나 과식안하기, 오후불식, 또는 한 끼만 먹는 일종식(一種食)을 한 철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수행자의 외형적인 면일 뿐 내면적인 변화와 발전과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자신이 계율과 대중의 규칙을 잘 지킨다는 집착을 가지면 그 순간 교만함이 마음에 가득 차오른다.

그리고 딱딱하고 거친 말과 행동이 튀어나온다. 계율을 잘 지키는 엄정한 생활가운데서도 수행자의 마음은 항상 자비심에 젖어있어야 한다. 뭇 생명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과 연민의 마음이 늘 가득해야 한다. 특히 나보다 수행과 정진이 부족한 사람에 대한 관용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기도와 수행에 철저한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과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곤 한다.

이러한 자만심과 교만함이 수행자와 기도하는 사람의 큰 병이다. 더욱 안으로 자신을 살피고 밖으로 자비심이 넘쳐야 하는데, 밖으로 타인의 허물만 보고 안으로 미움과 시비의 생각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
불자의 안거는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을 덜고 제거하는 수행과 기도의 기간이어야 한다. 혼자서는 잘 다스리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대중과 더불어 갈고 닦는 시간이다.
대중과 함께 하면서 평소 미진했던 기도와 수행에 힘쓰고, 한 해를 짜임새 있는 생활과 정연한 질서 속에서 잘 가닥 잡는 기간인 것이다.

혼자서 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러나 반면 혼자서 하기 힘든 것도 또한 수행이다. 자신의 내면의 번뇌와 망상을 쉬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일이다.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함께 수행하는 도반과 스승이 있으면 크게 의지가 되고 수행에 진보도 빠를 수 있다.
옛 스님들은 ‘대중이 공부시켜 준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마치 시냇물에 나뭇잎이 두둥실 떠내려가듯이 대중 속에 살면 저절로 쉽게 공부가 된다는 말씀이다. 아주 근기가 튼실하지 못한 사람이 혼자서 처소를 마련하여 지내면 대중 속에 사는 것처럼 생활을 짜임새 있게 하기가 힘들다. 조금씩 귀찮음과 게으름이 침범하게 된다.
먼저 식사준비와 시간을 어기게 되고, 낮 시간이 흐트러진다. 차츰 불필요한 외출이 자꾸 생기게 되고 하루전체가 망가지는 날이 있게 된다. 혼자지내면서 한 철, 석 달을 오롯하게 수행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전에는 수행생활이 10년이 안된 사람이 혼자서 머물며 수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병통이 생겨서 수행에 큰 장애를 만나기 때문이다. 실로 혼자 공부하다가 잘못된 길에 빠진 사람을 본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불자들도 스님들에게 공양하고 보시하는데 있어서 지혜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대중에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는 일은 거의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혼자 사는 스님이나 대중에 있는 스님이라도 개인에게 공양을 하거나 보시를 행하는 것은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한다.
가능하면 대중의 어른스님들과 상의해서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자칫 신도의 보시와 공양을 잘못 받아쓰게 되면 수행에 더없이 큰 장애가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특히 출가한지 오래지 않은 스님이 혼자 머물며, 정진이든 포교든 신도의 인연을 짓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일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잘 맺고 이어가야 한다. 현대한국불교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2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선원마다 조실스님들과 노스님들이 계셔서 일상 중에서 젊은 후학을 지도하고 이끌어 주셨다. 결제 때면 보름마다 법회가 열렸고, 때로 인자하고 때로 추상같은 큰 스님들의 법문은 젊은 수행자들의 마음을 다시 잡아주곤 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 점점 법회의 자리가 사라져 가고 있다. 결재, 해제법어도 없이 철을 사는 대중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선원에서 정진하는 대중은 늘고 있지만 질적인 변화까지 담보하고 있는지는 확신이 없다.

한 철 안거를 지내는 것은 불자들에게 해를 보내는 의미이다. 한 해 더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냥 보통으로 지내기보다는 가능한 최고로 잘 지내는 철을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구하고 채우기 보다는 버리고 비워서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좋은 스승과 제자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