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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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이루려거든 방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통도사 주지 소임을 맡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리고 주지 소임을 맡고 설판한 화엄산림을 마친 지도 어제일 같은데, 이제는 우란분절 49일 지장기도와 다음 53일 화엄산림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통도사에서의 지난 세월을 더듬어보고 또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을 점검해보니 하루 속에 1년이 다 들어있고 1년 속에 또 하루가 다 들어있다는 느낌입니다. 그것을 범위를 좀 더 넓혀서 생각해보면, 일생이 하루 속에 다 들어있어서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고, 시방삼세의 모습 또한 전생과 금생과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 역시 오늘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이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올 해 초파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초파일을 일주일 여 앞둔 지난 5월 초에 한 불자가 300만원이나 되는 시주금을 들고 찾아와서 등공양(燈供養)을 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부탁하기를, 부처님께 올리는 등공양 뿐만 아니라 가섭존자(迦葉尊子)와 아난존자(阿難尊者)를 비롯해서 보리달마(菩提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대사까지 33조사를 봉축하는 1년등을 모두 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40년을 넘게 절에서 살았지만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대개 불자들은 초파일은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날이니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봉축하고 찬탄하기 위해서 등을 밝힙니다. 그리고 우란분절(盂蘭盆節)이나 윤(閏)달과 같은 특별한 때가 되어야 자기 조상이나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孤魂)과 영가(靈駕)를 위해서 등을 밝힙니다. 그런데 그 불자는 초파일에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등뿐만 아니라 33조사(三十三祖師)까지도 모두 봉축하는 등을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자가 한 차원 높은 등공양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한 차원 높은 보시를 작년 겨울 화엄법회(華嚴法會) 때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불자는 버스를 타고 법회에 참석을 했는데, 언제나 흰 비닐봉투를 하나씩 들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절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눈에 띄는 쓰레기를 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눔이고 보시(布施)라는 생각에 역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올해 초파일을 앞두고 통도사에서 산문에 「4월 초파일은 홀로 운전자 출입금지」라고 팻말을 붙여놓은 것도 그러한 취지에서였습니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신평까지는 혼자 차를 운전하고 왔다 하더라도 부득이 절까지 차를 가지고 와야 한다면 걸어서 올라오는 이가 있으면 함께 타고 올라오는 것이 작은 나눔의 실천이고 보시라는 취지에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진정한 보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자들아, 어찌하여 이것은 보시요, 이것은 바라밀다(波羅蜜多)가 아니라 하는가? 달라는 이가 있음을 보고 주는 것은 보시요 바라밀다가 아니니, 달라는 이가 없는 데도 마음을 내어 스스로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다라 하느니라. 불자들아, 만일 때때로 주는 것은 보시요, 바라밀다가 아니거니와 항상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다라 하느니라. 불자들아, 만일 다른 이에게 주고 다시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보시요, 바라밀다가 아니니, 주고도 후회하지 아니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시바라밀다라 하느니라.”

즉,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누가 내라고 해서 내는 것은 시주이고 공양이고 보시이지 바라밀다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라밀다는 불자들이 초파일에 어떤 인연을 맺어 등공양을 올리든, 그런 인연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할 때 그것이 바라밀다라는 것입니다.
티베트의 소파 림포체라는 스님은 말하기를, ‘나에게 주어진 질병이, 나에게 주어진 늙음이, 나에게 주어진 목숨이 나쁜 업과 질병을 쓸어버리는 빗자루’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필 나에게 그런 나쁜 업과 불행이 주어졌느냐’며 한탄을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질병 중에 죽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등은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제일 좋은 세 가지는 젊음이요, 건강이요, 목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음이라는 것도, 건강이라는 것도, 목숨이라는 것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아등바등 해 보았자 모두 100년 안에 끝날 일들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자신의 삶속에서 1년을 보고 오늘의 삶속에서 일생을 보고 오늘의 삶속에서 3생(三生)을 보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를 갖게 된다면 오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지혜를 안다면 다음 생에 날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어차피 살아가야 할 세상이니, 그러려니 하고 금생에는 자기가 쌓아놓은 업을 쓸어낼 수 있는 빗자루나 하나 잘 만들어서 그 업을 싹싹 쓸어서 다음 생에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바라밀다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지은 나쁜 업의 결과는 언젠가는 반드시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왕삼매경론(寶王三昧經論)≫에서도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교만해지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고 했으며, 「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또 ≪능엄경(楞嚴經)≫에서도 「견견지시 견비시견(見見之時 見非是見)」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볼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요, 줄 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며, 때가 되어 가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요,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은 보시요, 시주요, 공양일지는 몰라도 보시바라밀다, 시주바라밀다, 공양바라밀다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식구들이 밥을 먹든 안 먹든 때가 되면 밥을 차려 놓는 것이 어머니 몫의 바라밀다 이듯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불자들아, 마치 사람이 큰 바다에 빠졌을 적에 송장이라도 붙들면 벗어남을 얻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할 적에도 그와 같아서 송장과 같이 하느니라.

불자들아, 사람이 마치 옥에 갇히면 문이 굳게 잠기고 뒷간 구멍만이 있는데, 그리로 나와서라도 가야하나니,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할 적에도 그와 같으니라.

불자들아, 마치 존귀한 사람이 위급하고 무서울 적에 의지할 때가 없으면 전다라에게라도 의지하나니,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함도 그와 같으니라.

불자들아, 마치 병난 사람이 병고를 소멸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더러는 부정한 것이라도 먹는 것과 같나니,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함도 그와 같으니라.

불자들아, 바라문들이 곡식이 귀할 적에는 목숨을 위하여 개고기라도 먹나니,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을 닦으면서 보시를 행함도 그와 같으니라.

불자들아, 대열반 중에서는 이러한 일을 한량없는 시간 동안에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을 듣는 것이니, 지계와 지계바라밀다와 내지 반야와 반야바라밀다는 부처님을 『잡화경(雜花經)』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으니라.」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기 때문에 세간에 대해서 많이 알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라도 성숙한 삶을 사는 건 모두가 다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에 의지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다 보면 그 파격적인 말씀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2600년 전에 설하셨던 그 말씀들이 첨단 과학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도 파격이고 충격으로 받아들일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티베트와 인도사람들은 수미산에 가서 호수에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시면 업장이 다 녹아내린다고 부처님 재세시 이전부터 믿어왔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수미산까지 도착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빙하지대를 넘고 얼음길을 건너 수천리 길을 걸어서 가다보면 얼어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그 호수에 도착해서 보면, 주위에는 죽은 사람을 화장해서 강물에 띄워 보내고 있는데 그 물에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물에 목욕해서 업장이 녹는다면 그 호수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뭐가 됐을까?”라고 하셨습니다.
또 인도 사람들은 부처님 이전부터 소고기를 먹지도 않고 잡지도 않았습니다. 그 풍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대중의 뜻이라면 소도 잡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 제일 계율(第一 戒律)인데, 하물며 인도 사람은 다른 짐승은 다 잡아도 소는 잡으면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소도 잡을 수 있다고 설파하신 부처님의 법문이 내게는 파격이요 혁명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도 합리주의적(合理主義的)이고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이며 실용주의적(實用主義的)인 법문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그리고 합리주의적이요, 현실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매사를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인물도 다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기운도 다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느낌도 다릅니다. 반대로 병든 사람을 보면 병들 일을 스스로가 합니다. 나도 얼마 전에 어금니를 하나 뺐는데, 이유가 젊었을 때 콜라 사이다 등 병을 입으로 많이 따서 그렇게 됐습니다. 군대 있을 때 군종병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법당에 불자들이 오면 음료수를 대접해야 했는데, 병따개가 없어서 이로 따다가 결국 그 이를 빨리 보낸 겁니다. 그러니까 괴롭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당시 코살라국의 왕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고자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면 오직 한 가지 게으르지 않는 것이요, 누구나 방일(放逸)하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면 이른바 소원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오.”

게으르지 맙시다. 모든 소원을 성취코자 하면 게으르지 말고 불방일에 의지해야 합니다. 만일 불방일에 의지하면 왕의 부인이 그것을 따를 것이요, 부인이 따르면 온 가족이 따를 것이요, 이웃이 따를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스스로가 게을러서 세상만사가 다 누워서 이루어지는 걸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방일에 의지하면 스스로를 지킬 것이며, 재물도 스스로 늘어날 것이며, 이른바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정진 합시다. 그것만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길이요, 한국불교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입니다.
E-mail : venjungwoo@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