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축년 하안거 결제날 만난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스님 -

유철주
조계종 기획실 홍보팀 주임

5월 햇살을 머금은 남도의 품은 넉넉하고 따뜻했 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기다리는 들녘 역시 황토 빛 속살을 내보이며 수많은 생명의 어우러짐을 준 비하고 있다. 그래서 논을 갈고 밭을 손보는 농민 의 손길은 더 분주하다.

5월 8일 기축년(己丑年) 하안거(夏安居)를 하루 앞둔 화엄사 선등선원(禪燈禪院)에서 후학들을 제 접하고 있는 현산스님 역시 넉넉하고 인자한 미소 로 선객들을 맞고 있었다. 부처님이 설한 화엄세계 (華嚴世界) 그대로 가람을 배치한 화엄사는 지리산 을 지키는 호법신장으로, 1,400년이 넘도록 그 자 리를 지켜왔다. 화엄사를 대표하는 각황전(覺皇殿) 역시‘깨달음의 왕인 부처님’이 항상 함께 한다는 뜻에 걸맞게 지리산 대중을 굽어 살핀다.


침묵으로 가풍 일러
검정고무신에 편안한 차림으로 기자들을 맞은 현산스님의 얼굴에서 촌로(村老)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묻어난다. 선원 큰방에서 삼배를 올리고 앉으니 현산스님은“지리산 기운이 참 좋다”며 선 등선원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많은 선방을 다녀봤지만 피로감이 없고 정진하 는데 장애를 느끼지 못하는 곳이 바로 이곳 선등선 원”이라며“많은 구참 스님들도 편안하게 정진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고 전한다.
화엄사에는 선등선원을 비롯해 탑전의 월유선 원, 봉천원의 남악선원 등 모두 3개의 선방이 있었 다고 한다. 선등선원은 2002년 3월 임진왜란 때소실된 옛 선원터에 건립됐다. 100여 평 규모의 선방과 요사채 등은 여느 총림(叢林) 선원 못지않 다. 방부를 들이는 스님들도 보통 30여 명에 이른 다고 한다.

“이번에는 예전에 비해 조금 적은 21명이 입방했 지만 정진 열기만큼은 그 어느 때에 못지않게 뜨거 울 것”이라고 스님은 자신한다.
스님은 선등선원의 가풍을 묻는 질문에는 침묵 으로 답했다. 한 기자가“스님, 선원의 가풍에 대 해 일러주십시오.”라고 청하자, 한참 뒤에“알겠습 니까?”라고 스님은 되물었다. ‘말없음’으로 일갈 한 것이다. 스님은“모르겠다.”는 중생들에게 친절 하게 다시 설명한다. “(하하하) 모르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선등선원의) 가풍입니다.”


선지식 곁에서 배운 것이라곤‘정진에 정진뿐…’
‘100안거’라는 상징적 숫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현산스님은 19세에 출가해 일생을 선방에서만 보 내왔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근대의 선지식을 모시 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인천 용화사에 조실채만 있을 때 전강스님을 모 셨습니다. 스님은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 12시만 되면 눈을 뜨고 정진을 거듭했습니다. 비 록 제가 젊었지만, 정말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수행력을 보였습니다. 그때 스님에게서 참 많은 것 을 배웠습니다. 범어사 동산스님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에 두루 능통하셨고 특히 계를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 으로 열반에 드셨다고 합니다. 종정이셨던 혜암스 님의 은사스님도 비록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 만, 당신이 언제 가겠다는 말씀을 하고 해인사 원 당암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할 정도로 엄청난 수 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님은 곁에서 봤던 고승들의 수행일화를 한참 동안이나 계속 얘기했다. 문득“스님이 대선지식 들을 통해 자신을 계속 다그치는 것은 아닐까?”하 는‘의심’이 든다. 스님은 곧 이어 요즘 납자들에 게도 죽비를 들었다.
“요즘은 세상이 편해서 인지 수행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저 옛 스승들의 삶과 수행을 다시 한 번 돌아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

그래도 안거 중 견처(見處)가 있어서 찾아오는 납 자들을 볼 때마다 반갑습니다. 견처에 안주하지 말 고 대오(大悟)할 때까지 계속 공부하라고 수좌들을 타이르고 다시 돌려보내곤 합니다. 더디지만 도인 이 또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을 자신의 일과 중의 하나로 스님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 다면 스님은 공부에 많은 진전이 있었을까? 스님 은 탑전(스님의 주석처, 화엄사 4사자 삼층탑 옆에 있다.)에서 정진 중“좋은 경험을 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듯하다”고 했다. 당신 역시 대오(大悟)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일까? 우문(愚問)이 잠깐 머리 를 스쳤다.

“마음자리를 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다보니 세월 이 금방 흘렀습니다. 무엇이든 오랜 시간 몰두해야 성취할 수 있잖아요. 다겁생(多怯生) 동안 쌓였던 습을 제거하는 공부에만 매달려야 견성할 수 있습 니다.”


생사해결, 참선에 답 있어
스님이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화두를 드는 것일까?
“세상은 덧없고 몸뚱이는 한량없이 덧없습니다.
언제 죽음과 재앙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에게 닥칠 지 모릅니다. 어제 충주 석종사의 젊은 스님이 아 침 공양을 한 뒤 갑자기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요. 한 스님이 안거를 보내러 오다가 그 소식을 듣고 석종사로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스님도 그런데, 하물며 보통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고 (苦)에서 벗어나려면 참선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참선(參禪)에 있다 는 것이 스님의 얘기다. 스님은 일체의 분별을 여 의고 깨끗한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 선(禪)이라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어느 때든 지 화두를 챙기는 것이 참선이라고 전했다.
“참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이 깨끗해 지며 허황된 것에 속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허허허.”


초심자는 앉는 습관부터…
스님과 같이 평생을 수행에만 매진해온 사람도 많지만 불교를 이제 막 접하고 마음자리를 찾기 위 해 고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일상사에 지쳐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특히 자신을 성찰하는 수행 이 더 중요하다.
스님은 초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앉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금강경>과 같은 경전을 계 속 독송하면서 마음공부를 하면 자연스럽게 화두가 들린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초심자들은 염불이나 간경, 기도를 하면서 신심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스님은 특히“각종 법회에서 법문을 하기 전에 모 든 대중이 <천수경>이나 <금강경>을 독송하면 탁한 기운이 사라져 법회 분위기가 제대로 잡힌다.”고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단다.
“<화엄경> 문수보살품에 보면 신시보장제일법 (信是寶藏第一法)이라 했습니다. 믿는 마음이 모든 보배 가운데 제일입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마음이 부처인줄 믿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제일가는 보배라는 것입니다. 신심(信心)이 모든 수행의 근본입니다.”

스님은 간담회를 마친 다음날인 5월 9일 각황전 에서 열린 하안거 입제법회에서도 신심의 중요성 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부처되는 길이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안거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가고자 안거를 하는 것입니다. 신심(信心)은 도의 근본이며, 법도 신심에서 나옵니다. 허망한 경계에 대한 분별심은 버려야 합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 려야 합니다. 부처님은 열반했지만 이 세상 곳곳에 법(法)은 충만합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부처 되는 길을 찾기 위해 우리가 결제에 들어가는 것인 만큼 신명을 다 바쳐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법상을 내려오는 스님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수십 수백 번을 해온 안거이지만 반드시 백척간 두에서 한걸음을 내딛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엿보 인다.
입제법회가 끝난 후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화엄 사 밖으로 나왔다. 화엄세계를 장엄한 연등을 뒤로 하고 수좌스님들은 선원으로 향했고 필자는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왔다.
나의 경계는 어디인가? 연등은 지리산 계곡 사이
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