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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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출가소식을 듣고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동자승들의 사진은 늘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의 애잔한 여운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어떤 장면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까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이맘때, 서울 조계사의 동자승 삭발수계식에 나선 아이들은 또 다들 어찌 그리 예쁘고 귀엽고 천진난만할까요. 그 아이들은 진짜 스님이 된 게 아니라 단기 출가한 거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도 제 슬픔이 아주 사그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때묻지 않은 유년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애잔한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시간과 함께 마모될, 스러져 갈 운명이기에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여우와 친구했다는 어린 왕자처럼, 동무하나 없는 깊은 산자락에 살면서 산짐승들과 벗하며 내내 아이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망을 알기도 전에 욕망에 다가갈 길을 차단당한 삶이 어떠한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대개의 욕망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세포의 확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저절로 증식하는데, 그 어쩌지 못할 난폭한 욕망을 일생을 두고 짓누르며 서로 불화해야 할 어린 운명을, 저는 상상조차 못 합니다. 속진에 전 제 영혼의 눈에는 ‘거름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하나하나 부딪치고 꺾이고 절망하면서 배워가야 할 세상살이의 고달픔보다 거세된 욕망의 슬픔이 더 크게 여겨지나 봅니다.
파르라니 깎은 동자승의 머리에서, 앙증맞은 먹물 가사에 감싸인 채 내보이는 무구한 웃음과 눈물에서, 저는 그런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슬픔만으로도 제 영혼이 잠깐 경건해지는 듯합니다. 허수경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슬픔만한 삶의 거름도 드뭅니다.
얼마 전 제 친구가 출가를 했습니다. 자주 어울리며 지지고 볶던 친구는 아니지만, 가까웠다면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 그리 자랑처럼 말해도 성내거나 불쾌해하지 않을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시인이고, 저는 그 친구의 시를 좋아합니다. 친구의 시를 읽으며 젖어 드는 마음을 물끄러미 응시한 적도 있습니다. 이따금 함께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 험상궂은 얼굴 생김과 달리 그렇게 선량할 수 없는, 겸연쩍음을 머금은 웃음으로 제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던 친구였습니다. (출가를 했어도 그는 여전히 내 친구인데, 왜 ‘~친구입니다’라 쓰지 않고 ‘~였습니다’라는 과거시제를 썼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틀린 표현일 텐데, 그 시제의 선택이 어쩌면 지금 그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 내지르는 투덜거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7,8년쯤 전이었던가 봅니다. 그 친구는 제게 불교공부 모임을 함께 하자고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불경을 읽고 강독하면서 서로의 생각과 지식을 나누는 모임이었는데, 어울려 인도 등지로 여행도 다니는 눈치였습니다. 천성이 게을러 공부라면 도리질부터 하고 보는 저는 당연히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던 친구의 시선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간간이, 일 때문에 혹은 그냥 일없이, 인사동이나 대학로 등지에서 우리는 만났지만, 친구는 공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전처럼 한결같이, 제가 누구의 험담을 해도 좀체 동조하는 법 없이 예의 그 겸연쩍은 웃음으로만 호응했습니다. 그 미소 안에 저에 대한 측은함이 담겨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친구의 출가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섬광처럼 번쩍 들기도 했습니다.
친구는 지금 경남 합천의 해인사 승가대학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이따금,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구의 삭발한 모습을 그려보곤 합니다. 그 상상만으로도 제 마음은 살포시 젖습니다.
저는 스님들이 왜 삭발을 하는지, 누구에게 물어 대답을 얻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주워들은 풍월로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 상징적인 행위’일 거라 짐작할 뿐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삭발은 출가 수행자의 모습으로서 세속인과 다름을 구분 짓고, 또한 세속적 번뇌를 단절함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하여 ‘세속적 욕망의 상징’으로 본다. 그래서 삭발은 세속에서 벗어나 구도의 대열에 들어선 출가자의 정신의 상징이고, 청정수행의 의지의 표현이다.
또 이런 아주 전문적인 설명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삭발에 대해 “태자가 칼을 가지고 스스로 수염과 머리를 깎고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아서 일체의 번뇌와 습인(襲因)을 남김없이 없애기를 발원하노라’ 하셨다”고 하여 머리카락과 번뇌를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어떤 경전에서는 머리카락을 교만심과 연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즉 비니모경 제3권에 ‘머리를 깎는 이유는 교만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믿기 위함’이라고 했으며, 대지도론 제49권에는 “나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발우를 가지고 걸식을 한다. 이러한 것은 교만을 부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삭발을 하는 것은 수행을 방해하는 근원인 아집과 교만, 그리고 온갖 유혹의 감정을 끊는다는 것을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정신에 따라서 승려들은 출가 후 불교의 입문식인 득도식(得度式)의 의식을 따라 삭발을 하고, 그 뒤에는 보름마다 한번씩 삭발하는 것을 통례로 하고 있다.
보름쯤 전에 저도 삭발을 했습니다. 6mm만 남기고 머리카락을 죄다 밀었습니다. 지금 제 머리는, 헤어스타일만 보자면, 게으른 스님들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1년 365일 삽살개처럼 머리카락을 늘이고 다니던 자가, 빠박머리로 나타났으니 주위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직장 다니는 마흔 넘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삭발을 했을 때는 필시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 짐작들을 할 테지요.
동료들은 실제로 아주 조심스럽게 묻곤 합니다. 왜 깎았느냐고요. 저의 대답은 매번 달라집니다. “시선 끌어보려고 발광을 해보는 거지”라고 대꾸하기도 하고,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의 한 구절을 끌어와서는 “번뇌가 별빛이라…”하며 얼버무리기도 하고, 대답하기 귀찮을 땐 “그냥 더워서” 혹은 “사월초파일 기념으루다…”라고 무질러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도 제가 왜 삭발을 감행(?)했는지 모릅니다. 삭발만 하면 별빛처럼 어지러운 번뇌가 씻길까 기대했을 수도 있고, 특별한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 보이고 싶은 천한 욕망이 그렇게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날은 덥고 씻고 말리기 힘들어 밀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모두가 이유일수도 있고, 제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제 마음 속의 감춰진 요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이 부셔서 살인을 했다는 까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고 해서 그게 꼭 거짓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성취해 신문이나 방송 인터뷰에 응하는 이의 말들은 모두 진실일까요? 자신의 모든 행위를 명쾌하게 해명하고 논리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근래 제가 읽은, 마이클 코넬리라는 미국 작가의 어떤 소설에는 “거짓말을 가장 그럴듯하게 하려면 가능한 한 많은 진실을 섞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수긍합니다. 순도 100%의 진실은 없고, 99.999%의 진실이라고 해도 0.001%의 거짓이 영혼에 대한 신뢰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기도 하는 게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세상입니다. 인간이 진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 진실한 존재인 척 꾸미지만, 그 역시 공허한 삶을 견디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 같은 건 아닐까요? 아까 언급한 그 작가의 다른 소설 속 주인공은 “색소폰 소리처럼 진실된 것은 이 세상 아무 데도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친구는 머리를 깎은 걸까요? 물어보나마나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필시 그조차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질문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일생을 두고도 찾지 못할 수 있는 대답을 요구합니다.
말없이 늘 한결같은 미소로, 한없이 열려 있는 진실로 그를, 그리고 우리를 바라봐주시는 부처님은 아실까요?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작정하고 앉아 지칠 때까지 캐물어볼 참입니다. 제가 느끼는 이 슬픔의 정체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