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
박사, 동국대 인도철학과
필자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로 8년 여 동안을 살아 온 기억이 있다. 채식을 하게 된 배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였다. 친구들이 개구리와 개미를 장난삼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친구들의 장난스런 모습들과 죽어가던 미물들의 모습은 나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무언가에 생채기를 크게 내고야 말았다. 많은 생각을 했고, 끝내는 육식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때문에 밥상머리에서는 늘 부모님과 형제들로부터‘스님 되려고 고기를 안 먹는 것이냐’ 는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비록 다시 어떤 계기로 육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는 있지만, 마음 한 켠이 늘 개운치 못한 것은 아직도 육식이 온전히 용납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한 달 전 동국대학교에서는 국내외 많은 불교학자들이 모인 가운데‘한국불교학결집대회’가 열렸다.
이 때 스리랑카에 유학하고 있는 중국스님의 발표 제목은“불교에 있어 동물과 사람의 지위”라는 것이었다. 통역과 사회를 필자가 맡았는데 발표 중 한 스님으로부터“불교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는다 할 때 어떠한 마음자세로 고기를 먹어야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어떠한 의견에도 참석자들 모두 만족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발표를 대충 마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필자는 한동안 같은 질문을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던져보았지만 아직까지 흔쾌하게 받들어 지닐만한 답변은 없었다. 과연 어떠한 마음자세로 육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까?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고기는 남성적인 음식으로 여겨졌고, 남성은 강하며, 강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인류에게는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거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신을 최고신으로 삼은 종교의 일반적인 현상은 동물을 살해한 제물로 신을 달래고 기쁘게 하는 제사를 지내왔다. 예를 들면, 불교가 일어날 때의 바라문교의 동물희생제의나 <성경>의 번제나 화제가 모두 동물을 희생시켜 치루는 제의로서 현재 기독교에도 예수를 희생양이라는 믿음 속에 행해지는 미사의식이 또한 다름 아닌 동물희생제의의 다른 형태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동물들 가운데 육식동물은 전체의 20%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과 같은 모든 영장류는 일차적으로 채식동물로서 원시인류의 경우 치아 구조상 육식보다는 야채, 곡물, 견과류, 과일 등을 씹고 갈아먹는 데에 더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송곳니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니 역시 날카롭지 않고 평평하였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육식을 위해 스스로 가축을 잡아 죽여서 칼로 배를 갈라서 내장을 꺼내고 요리를 해서 먹는 것보다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다른 사람에게 이를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으면서도 고기를 잡는 사람들을 경멸해 온 것이 인류사회가 보여준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 이다. 즉 인간의 육식문제는 동물을 착취하는 과정 속에서 같은 사람에 대한 착취까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 있어 현재와 같이 육식을 많이 하는 일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은 육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 이전에 이미 육식이 익숙해져 고기 맛을 거부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동물의 죽음을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가운데 고기를 단지 물질적인 음식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기며 먹는다. 최근의 한 일간지에 의하면 이렇게 먹기 위한 도축에 있어“가축들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목이 잘리거나 가죽이 벗겨지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거꾸로 매달린 소의 다리에서부터 복부, 목까지 차례로 가죽을 벗기고 다리를 잘라내는 동안에도 소는 숨을 내쉬며 신음소리를 낸다”고 하는 증언의 기사를 접했다. 이는 상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진다. 사람이 어찌 산 생명을 그리도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동물을 향한 측은지심, 즉 자비심의 발로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던 두 고승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진표율사와 혜통국사가 그들이다.
진표율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이다. 스님은 어렸을때 사냥 길에 밭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려고 물속에 잠시 담가 두었다. 그런데 정작 집으로 갈 때에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다른 길로 가고 말았다.
이듬해 봄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고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아직도 나뭇가지에 꿰인 채 살아서 울고 있었다. 문득 지난해의 일을 생각해낸 진표율사는 크게 잘못을 뉘우쳤고, 채식의 길인 출가를 결행하였다고 한다.
혜통(惠通)국사도 출가 전에 물가에 놀러갔다가 수달피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몸을 버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니 몸통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핏자국이 어디론가 나 있어 따라 가 보니 수달피가 사는 굴에 이르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가죽이 벗겨져 피를 흘리는 수달피가 다섯 수달피 새끼들 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스님 역시 채식의 길인 출가를 결심하였고 실행에 옮겼 다고 한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신이 사람에게만 영혼을 불어넣고 사람 이외의 동물에는 그렇지 않았다하여 동물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서양에서는 동물의 고기를 단순한 소비재로써 인식할 뿐이 었다. 그러나 불교는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사람 아닌 다른 동물들에게 있어서 생명존중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다 같이 소중한 가치를 가진 생명체로 인식하므로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또는 그것을 음식으로 삼는 데는 상당한 주의를 당부한다.
가령, 『본생경(本生經)』에만 해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이었을때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품속으로 날아들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곧이어 뒤쫓던 매가 보살에게 자신의 먹잇감을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이에 보살은 자신은 모든 중생을 다 구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기에 돌려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매는 자신 또한 보살이 구호할 모든 중생 가운데 하나이므로 자신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래서 보살은 날고기를 먹고 싶다는 매에게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주었지만 매는 비둘기와 똑같은 무게의 살덩이를 요구하였다. 보살은 저울을 가져다 베어 낸 살덩이와 비둘기를 달아 보았다. 비둘기가 훨씬 무거웠다. 보살은 다시 다른 다리의 살을 베어, 두 덩이를 합쳐 달게 하였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벼웠다. 그리하여 두 발꿈치, 두 엉덩이 두 젖가슴의 살을 베어 달았으나 이상하게도 베어낸 살이 비둘기의 무게보다 가볍기만 했다. 마침내 보살은 자기의 온몸을 저울 위에 올려놓자 수평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 내용의 핵심은 모든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함에 있다.
오늘날 육식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연구, 증명되고 있다. 지구상 어디에도 육식을 주로 하는 곳에 장수촌은 없다. 오히려 채식을 통해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다는 통계는 속속 보고되고 있다.
세계에서 육류소비가 가장 많은 미국이‘성인병의 천국’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성인병 발생률이 증가하고 있는 것 역시 육식식단의 보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인류사에서 육식문화는 여러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같은 생명으로서의 윤리적인 차원은 물론 육체와 정신상에 그리고 사회적인 차별까지도 연관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때문에 불교에서 가능한 한 살생하지 말 것을 권하는 맥락은 여러 측면에서 깊은 함의가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에 있어 과도한 육식에 대한 반성과 그에 대한 대안제시가 다시금 거론되고, 불살생계가 조명을 받고 있다는 점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