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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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포살 정신 꼭 실현되어야

변대용
불교TV 보도국장

포살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들
2008년도 한국불교의 화두는 조계종 총무원이 종책불사로 추진하는 포살이라고 본다.
포살에 대한 반응은 포살의 의미와 해석을 넘어 상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지면 재가불자들은 찬성, 스님들은 반대이다.

6월 3일, 17일 조계사에서 시행한 포살법회에 참석한 스님들의 표정은 한 마디로 귀찮다는 것이었다.‘ 스님 어쩐 일이십니까?’물음에 스님들은“보면 모르나? 포살하러왔지, 주지직이라도 계속 하려면 와서 눈도장이라도 찍어야지.”라고 말을 하지만 그 표정은 하기 싫은데 할 수 없이 왔다는 것이다.

포살을 준비하는 종무원들에게‘잘될 것 같아?’라고 물으면“걱정이에요. 얼마나 동참할지, 한국불교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의식인데,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 점만을 제기하고 있으니…”라며 걱정스러운 대답을 하였다.

포살을 지켜보고 있는 불자들은“스님들이 스스로 포살을 통해 잘못을 참회하니 제가 부끄럽네요, 스님들이 이런 모습은 아직도 한국불교가 살아있고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하네요.”라며 좋아했다.
이같이 결계포살에 대해 불자들은 스님들이 정기적으로 포살을 봉행하기를 바라며, 불교의 발전뿐 아니라 스님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스님들은 이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대중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총무원이 너무 서두른다. 포살을 강행하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냐,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냐?”등이다. 또한 포살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 보다는 정치적으로 이해하고, 다른 문제를 가지고 포살을 방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살의 기획을 어디에서 누가 했다, 어디에서 책을 제작했다는 등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로 포살의 의미를 실추시키고 있다. 스님들이 포살을 반대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6월 3일과 17일 조계사에서 봉행된 결계포살법회 모습


승가가 보여준 그동안의 행태
현장을 지켜보고 포살시행 추진일정을 바라본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포살이 너무 늦었다는 입장이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불교가 즉, 스님들이 세간에 보여준 모습은 어떠했는가. 청정승가 다운, 화합승가 다운, 수행자 다운 승려의 모습을 보여 주기보다는‘스님들이 저럴 수 있나’라는 의구심만 심어주었다. 한국불교계의 중책을 맡고 있는 스님은 TV 인터뷰에서“상대방에 대해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목을 잘라버려야 한”는 말을 부끄럼 없이 내 뿜었다. 이 한마디로 불교계는 자비문중이 아닌 살인문중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삼보정재의 무단 사용, 부절적한 로비, 승려답지 않은 행동 등이 잠시라도 불교계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으며, 그 가운데는 항상 스님들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은 자기 잘못을 참회하지 않았다. 당사자 스님 또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단지 종단이 봉암사에서 참회하는 모습을 잠시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 이후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계속해서 언론에서는 불교계의 비종교적인 모습을 고발하였다. 이 같은 보도에 대해 스님들은 개선의 노력보다는 불교 죽이기를 위한 편파적인 과잉보도라고 일축하고 있을 뿐이다.


포살은 계속 행해져야 한다.
승가는 삼계도사이며, 사생의 자부이다. 스승이며, 어버이라는 것이다. 꼭 종교적인 해석이 필요 없는 말이다. 스승과 어버이로서 해야 할 행동과 말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언행은 불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믿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또한 이미 불교를 믿는 불자들에게는 신심을 굳게 지키는 동기부여이다. 그런데 스님들의 언행은 불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어주었고, 불교를 믿는 신도들에게 신뢰를 떨어뜨리게 했다.

불교계도 승가도 이 사회를 떠나서 움직일 수 없다. 이 사회의 가치관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승가가 보여준 모습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았다. 불자들과 시민 들과 관계없이 꿈틀거리는 승가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포살은 승가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승가 스스로 화합하고 결속할 수 있다는 움직임이며,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한 수행자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는 힘이며, 불교가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신뢰의 바탕이다.

그러므로 포살은 단기간 보여주는 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포살은 항상 진행되어야 한다. 동참하는 수가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인 동기도 문제가 될 수 없다. 불교계를 더럽혔던 오점들을 지울 때까지, 중생들이 다시 승가를 믿을 때까지, 부처님 가르침이 중생계에 회향될 때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포살은 불교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승가는 중생들과 함께 움직이는 신앙공동체이다. 스님들만 있다고 신앙공동체를 구성할 수 없다.
승가는 중생들에게 삶의 지혜와 행복을 주지만, 반대로 재가는 승가에 종단이 운영될 수 있는 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관계 속에서 불교는 발전하고 나아가 사회에 회향하는 것이다.
과연 불자들과 중생들은 무엇으로 승가를 믿을 수 있을까. 최근 세간에 투여된 승가의 모습으로는 신뢰라는 단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신뢰가 없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대중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한 종교는 죽은 종교이다. 죽은 종교는 이 사회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불교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가 바로 포살에 있다. 포살은 바로 승가를 유지하는 기본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수행과 포교, 그리고 청정과 화합, 나아가 중생들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근본이다.
살아있는 불교,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 사회에 회향하는 불교를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승가는 반드시 포살로 시작해야 하며, 그래야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