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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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의 도리는 일심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내일도 또 그럴 것이다. 문제는 보다 나은 방향을 위한 모색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선(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갈등의 노출일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때문에 그런 와중에서 갈등의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그대로 수용하며 원만하게 해결하는 역사와 사회는 발전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늘상 분쟁이 발생한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사람은 건전한 삶을 살아간다. 그 문제 해결의 원리를 화쟁(和諍)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화쟁(和諍)이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을 수렴하고 그로부터 여법한 도리로 통일하여 상생의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여러 가지 의견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화쟁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분란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원효는 화쟁의 원리에 대하여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의 무생행품 및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일심에 근거한 그 실천을 주장하였다. 때문에 원효는 후인들로부터 화백가이쟁(和百家異諍)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곧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이변이부중(離邊而不中)·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 등은 이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그 화쟁의 전개방식이 총이언지(總而言之) 별이논지(別而論之)였다. 전체적인 입장에서 모든 의견을 수렴하면서도 각각의 의견에 대해서는 그 장단점을 논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의 제이 무생행품에서 마음의 자성을 터득한 사람의 속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이고,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것이다. ‘같다’는 것은 다른 것에서 같다는 것을 변별한 것이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같은 것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 것’은 같은 것이 나뉘어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같다는 것을 변별한 것’은 다른 것이 없어져 같아진다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같다는 것’은 다른 것을 없앤 것이 아니므로 같다고 말할 수 없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눈 것이 아니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可說]과 말할 수 없다는 것[不說]은 다름도 없고[無二] 차별도 없다[無別].


이것은 의견의 같고 다름에 대하여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부정하고 그 나머지만 모아서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의견에 대하여 다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버리지 않고 각각의 입장에 대하여 꼼꼼히 따져보는 안목을 말한다. 같다는 점으로 말하지만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르다는 점으로 말하지만 동일한 것을 여러 가지로 나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같고 다름은 각각 다르고 같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이와 같은 실천방식에 대하여 《논어》에서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지만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말한다. 곧 군자는 남의 의견에 화동하지만 굳이 아첨을 떨면서까지 남의 의견에 화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화쟁의 근본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이 원효의 생각이다. 그것을 원효는 일심(一心)이라 하였고, 혜능은 자성(自性)이라 하였다. 가령 사회를 투쟁의 연속으로 간주하거나 조화의 연속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이다. 그 마음이란 경우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일정한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도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만다. 그 최소한도의 기준이 원효에게는 일심이었고 혜능에게는 자성이었다. 그 일심 내지 자성을 선의 실천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 다름 아닌 자각(自覺)이다.
그 자각은 어느 곳을 향하여 지향한다든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조작하여 만든다든가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지금·여기에서 주인공이 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자각은 내가 나 이외에 그 무엇이 될 수가 없다. 그 무엇도 나 자신이 될 수가 없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금(卽今)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피안의 정토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대로가 정토이고 아미타임을 일상에서 자각한다. 따라서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은 항상 탈출해야 할 일상이다. 그대로 눌러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부단히 새로워지고 부단히 변화하는 자신을 찾아야 한다. 어제의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 오늘의 나는 내일을 향한 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일상에서 일상을 탈출하는 것이다. 반드시 일상을 딛고 탈출해야 한다. 일상을 벗어나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다. 《보림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본심 떠나고 싶지 않거든
만약 땅에 넘어진 자라면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땅을 떠나 일어나려 하면
끝내 일어날 수가 없으니
그대 곧 본심에 돌아가라

 
이것은 철저하게 현실에 대한 자각을 설파한 말이다. 그래서 물론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한다. 자신을 떠난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러면서 궁극에는 주인공이라는 자신을 잊어야 한다. 이리하여 이미 잊혀진 자신이 되었을 때 비로소 본분사(本分事)를 마친 본분인(本分人)이 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새로운 인간관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항상 고정적인 개념과 논리를 탈피하여 현실의 행동 그 자체를 전체로서 긍정한다. 그리하여 그 스스로가 정해진 형식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모든 형태를 드러낼 줄 아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런 주인공의 자각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만류를 수용하고 만류에 휘둘리지 않고 그 진면목을 파악하는 화쟁의 안목이 형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