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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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마음 헤아려 보기

안현숙
수필가


퇴근 후 저녁 먹고 들어오겠다는 작은 아들이 12시가 다 되도록 오지 않고 있으니 애 아빠가 전화를 해보라 한다.
“때 되면 들어오겠지.”
나는 비교적 귀가 시간엔 너그러운 편이라 아이들이 늦어도 굳이 전화를 걸거나 하진 않는다. 밖에서 친구들 만나 놀다 보면 늦게 들어올 때도 있는 일인데, 집에서 전화를 걸어 왜 아직 안 오느냐고 하면 그것처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때 되면 들어올 건데 잘 놀고 있는 애한테 전화해서 귀가시간 독촉하는 건 별 효과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애 아빠가 더 걱정을 하며 아이들한테 전화를 걸곤 하는데, 자기 젊었을 때 생각 안 하고 아들 녀석들의 귀가 시간에 예민한 걸 보면 웃긴다. 영업 쪽 일을 오래 한 사람이라 아침에 나가면 오밤중에 들어오는 건 다반사고, 하루걸러 하루에 두 번 들어오기도 한 생활이었으면서 그때 생각 다 잊어버리고 12시 가까워지면 꼭 전화를 하려고 든다. 어쨌거나, 애 아빠가 전화 거는 동안 난 방에 들어가서 잠잘 준비를 하는데, 금방 아들이 들어온다. 거의 집 앞에 다 왔는데 애 아빠가 전화를 한 거다. 그러게, 다 때 되면 들어온다니깐…….
들어온 아들, 오자마자 식탁에 앉아 큰아들이 나 먹으라고 사다 준 초콜릿 하나를 까먹는다.
“뭐하고 왔어?”
그러는 애한테 애 아빠가 묻는다.
“친구 만나 저녁 먹고 축구하고 왔어.”
‘축구를 하고 온 놈이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식탁에 앉아 그 더러운 손으로 초콜릿을 먹어?’
나는 잠자리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축구하고 왔으면 옷 벗어서 목욕탕 가서 탁탁 털고 샤워도 하고 그래야지. 그 먼지 묻은 몸으로 뭘 먹어?”
“아니 엄마 왜 그래? 뭔 옷을 벗어서 털어?”
“축구하고 왔다며?”
“달밤에 체조할 일 있어? 무슨 오밤중에 축구를 해? 겜방에서 오락 축구 했다니깐!”
띠용~~~ 쳇! 내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 축구했다니까 친구하고 운동장에서 뛰다 왔는지 알았지, 겜방이란 곳에서 오락 축구하는 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애 아빠와 애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쯧쯧 거리더니 아들놈, 장난을 친다.
“옷 벗어서 목욕탕 가지고 가서 탁탁 털어야지, 샤워도 해야지~ 엄마 사오정이야?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요새? 이상하네, 거참!!!”
세상에…… 이렇게 해서 금방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오정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경우,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기보다는 내 생각대로만 들었기 때문에 축구를 하고 왔다면 당연히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를 생각한 것이지, 또 다른 축구도 있다는 걸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위의 대화가 아주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렇듯 우리는 상대방의 말이나 뜻을 잘 못 헤아려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 보니 오해가 생기고, 서로 자존심의 싸움이라든가 지기 싫은 마음에 오해를 풀 수 있는 시기를 놓쳐 나빠지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경우, 숨 한번 크게 쉬고 천천히, 마음을 열고 끈기 있게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로의 의견이나 뜻이 다르다고 상대방의 입장이나 마음을 헤아리기에 앞서 제 목소리 높이기에 종종 열을 올리다 보면 좋은 사이도 나빠지는 경우가 생기고, 잘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시기를 놓쳐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성격의 차이도 있겠으나 국민성의 기질에도 문제가 조금은 있는 게 아닐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우리 선조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게 살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남 잘 되는 것을 축하해 주기는커녕 배 아파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면서 못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남을 밟고 일어서서라도 악착같이 잘 살기를 바랐으니 무슨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 간에 이해와 소통이 가능했겠는가. 당파싸움에서도 보듯이 자기네 이익만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 사이에 무슨 소통이 있었겠는가. 그저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지금 현실에서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씩이라도 기꺼이 양보한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건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 간에 신뢰가 쌓여 많은 이해와 소통이 이루어져 더욱 살기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내 생각이다.
그래도 요즘은 쉽게 “소통하는 사람, 소통하는 사회”라는 문구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런 문구를 자주 접하다 보면 한번이라도 더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자기의 목소리만 높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상대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씨앗이 심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번 서울 페스티벌에서도 ‘소통’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걸 보면, 우리 현실에서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을 이슈로 삼아 지혜롭게 풀어 나가야 할 때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문제는 ‘오해’에서 생기고, 그 ‘오해’라는 것은 ‘소통’의 단절로 인해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조선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했으니, 이제는 내 생각에 앞서 남의 생각도 좀 잘 들어주고,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많은 대화를 나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성숙된 지혜를 모두 갖게 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래본다.